1842년, 영국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맺은 난징 조약에 따라 홍콩제도가 영국에게 할양되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구룡반도와 신계가 영국령 홍콩에 편입되었다.
1971년 동아시아 전쟁에서 패전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뉴어크 평화조약을 통해 신계 및 구룡반도에 대한 권리를 승전국인 한국, 동중국, 소련 그리고 인도에게 양도했다. 구룡반도와 신계를 영국이 반환해야할 시점이 다가오자 4국[3]은 홍콩 주민투표를 통해 홍콩의 운명을 결정짓기로 합의하였다. 1997년 치루어진 선거에서 친중파가 동중국 편입과 서중국 편입으로 입장이 갈라진 덕에[4] 독립파가 승리, 홍콩은 독립국이 되었다.
우산혁명 시위대
독립 이후 홍콩은 신민주동맹으로 대표되는 자주파와 인민공화연맹으로 대표되는 친중(친서중국)파가 양강을 이루었다. 하지만 2014년 당시 여당인 인민공화연맹의 가맹정당이었던 신민당과 공회연합회가 서중국에 국가기밀을 넘기고 유사시 서중국 인민해방군을 끌어들이려 한 사실이 폭로되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우산혁명이라고 한다. 시민들이 우산으로 공안이 살포하는 최루액을 막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결국 스태리 리 총리가 사태에 책임을 지고 퇴진하였다. 공회연합회는 자진 해산했으며 신민당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강제 해산되었다. 인민공화연맹을 주도하던 민건련 역시 튼 타격을 받고 온건파 정당인 자유당에 흡수되었다.[5] 인민공화당 소속 주요 4개 정당 중 1개만 남으면서 자연스레 인민공화연맹은 사라졌고 현재는 신민주동맹과 자유당, 그리고 본토민주전선의 2강 1중 체제가 유지되고있다.
경제적으로 매우 발달되어있다. 동아시아 대표 무역항 중 하나이며 금융 중심지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매우 빼른 경제성장을 겪었다.
타 국가에 비해서 정부가 시장에 대한 개입을 자제하는 편이다. 이는 홍콩이 한국이나 동중국 등 국가 중심 경제건설을 한 타 국가들과 달리 영치 시기 시장 중심 경제건설을 해냈기 때문이다. 관세와 법인세도 상당히 낮고 상속세도 낮은 편이다. 다만 공항,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관리는 국가에서 담당한다.
주거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워낙 땅은 좁은데 인구는 많다보니 주택 값이 미친 듯이 높아서 주택 중위 가격이 세계 1위를 찍을 정도이며 심지어는 1평이 채 안 되는 주택도 허다하다.
영화: 1980년대부터 일명 홍콩 영화가 크게 발전했다. 주윤발, 성룡, 이연걸 등의 걸출한 배우들이 홍콩 영화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2000년대까지 홍콩 영화계에서는 경찰물, 재난물, 액션물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 등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으나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거에 비해 상당히 쇠퇴했다.
음식: 파일:홍콩 길거리 음식.jpg홍콩의 길거리 음식중국 요리와 영국 요리, 기타 다양한 국가의 요리법이 유입되어 동서양이 결합된 다채로운 식문화가 공존한다. 일본과의 교류와 대규모의 인도인 이민자들로 인해 일본 요리와 인도 요리도 널리 퍼져있으며 동남아 요리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없는 게 없다. 영국의 영향으로 티타임이 존재하지만 영국과 달리 우유를 넣은 밀크티보다는 연유를 넣은 밀크티가 더 많이 소비된다. 집값과는 달리 음식값은 굉장히 싼 편이다.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태영호는 2013년 당시 막 주홍콩한국대사에 취임해 홍콩에 갔을 때 음식값이 무척 싸서 놀랐다고 한다.
공용어는 영어와 중국어로, 자주파 내각에서는 영어가, 통합파내각에서는 중국어가 조금더 중시된다. 공용문자는 영어 알파벳과 한자로, 한자는 번체를 사용한다. 2003년에 제정된 '언어 및 문자 조화법'에 따라 모든 종류의 공문서는 영어와 한자 두 종류로 작성되며 기업 역시 고객에게 두 언어와 문자를 모두 제공해야한다.
통수권은 홍콩 총리에게 있으며 국방부장이 감독권을 행사한다. 군령권은 합동참모의장에게, 군정권은 3군 참모총장들에게 있다.
상비병은 총 1만 3천 명으로, 전원 모병제로 충원된다. 홍콩은 청년 실업률이 꽤 높기 때문에 경쟁률이 상당하다. 이외에도 2만여 명의 예비군이 있다.
홍콩은 현재 서중국을 제1의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있다. 서중국과 홍콩은 국력의 차이가 압도적인데다가 홍콩이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양측의 무력충돌이 발생한다면 홍콩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렇기에 홍콩은 방어 보다는 고슴도치 전략을 핵심 전략으로 가지고있다. 서중국이 홍콩을 공격하면 홍콩은 무너질지언정 홍콩과 가까운 광저우만 연안의 광저우, 선전 등 서중국의 경제중심지를 무차별 타격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남기는 것이다. 홍콩군이 고슴도치 전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으나 너무 뻔하기 때문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해군과 공군 전력 일부는 유사시 반격을 위해 중화민국령 남중국해 제도에 동중국의 허락을 받고 배치해놓은 상태이다.
홍콩 육군은 고슴도치 전략을 위해 다수의 다련장로켓포를 보유중이다. 유사시 광저우와 선전 등 인접한 서중국 도시들을 파괴하기 위함이다. 다련장로켓포로는 체코제 RM-70 54문, 미제 HIMARS 36문을 운용하고있다. 다 합치면 5개 대대 분량으로[6], 국가의 체급에 비하면 상당한 수량.
↑러시아는 당시 경제 침체로 홍콩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고 인도는 홍콩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동중국은 홍콩을 가지고싶어했지만 본토와 멀리 떨어져있는 탓에 실질적으로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국과 동중국은 홍콩의 서중국 편입만은 막기로 합의했고 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도록 선거를 설계했다.
↑신민당, 공회연합회 소속 일부와 민건련 강경파는 인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