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루마니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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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대결 구도
붉은 군대 vs 미군
루마니아 쿠데타 (혁명)
Revoluția din decembrie (12월 혁명, 루마니아어)
Rumänischer Staatsstreich (루마니아 정변, 독일어)
진압군의 전차를 빼앗아 인민궁전으로 진격하고 있는 시위대
기간
1989년 12월 23일 - 12월 26일
장소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원인
루마니아 공산당 내 권력 싸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폭정에 대한 전민적 반발
교전 국가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루마니아 구국전선
루마니아군
반 차우셰스쿠 시위대
국제 사회주의 노농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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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표명 국가
미국
중국
유고슬라비아
국제연합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지휘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엘레나 차우셰스쿠
이온 일리에스쿠
페트르 로만
드미트루 마질루
빅토르 스턴쿨레스쿠
바실레 밀레아
마레크 카지미에시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알렉산데르 릴로프
피해
4명 사망
17명 부상
558명 연행 및 체포
3명 사망
11명 부상
민간인 127명 사망
결과
쿠데타 측의 승리
영향
루마니아의 민주화 (1989년)
루마니아 신헌법 발효 (1990년)

개요

루마니아 쿠데타(독일어: Rumänischer Staatsstreich) 혹은 루마니아 혁명(루마니아어: Revoluția din decembrie)은 1989년 12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괴뢰정권이 붕괴되고 이온 일리에스쿠가 이끄는 구국전선이 무력으로 집권한 쿠데타 혹은 혁명을 가리킨다.

15년간 폭정을 이어온 차우셰스쿠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차우셰스쿠는 권좌에서 쫓겨난지 겨우 하루만인 12월 25일 즉결심판을 통해 처형당했다. 일리에스쿠의 구국정부는 루마니아를 재 사회주의화시키며 민주화를 이행하였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현재도 엇갈리고 있다. 이는 발칸반도의 비동맹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연쇄 붕괴로 이어졌으며 루마니아 붕괴 후 얼마 가지 않은 1991년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었다.

배경

차우셰스쿠의 폭정

1965년 게오르기 게오르기우데지의 사망으로 권좌에 오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으로 루마니아를 부강히 만들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프람 서기장의 집권 후 라트 연방의 노선에 반발해 비동맹주의 노선을 관철하여, 1974년 스스로 대통령 직위에 오르고 라트 연방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와 더불어 제3세계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나아가 차우셰스쿠는 개인 우상숭배 작업과 대숙청, 제국주의 진영과의 우호를 통하여 기존 사회주의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원년 지도자들을 배제하고, 괴이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다. 또 루마니아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파시스트 이온 안토네스쿠를 찬양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시장사회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소규모 사업체에 대한 개인의 사적 소유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투자 지원까지 받아 사실상 친제국주의, 친자본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행보는 루마니아인들을 분노하게 하였으며, 라트 연방코민테른은 1979년 루마니아가 사회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퇴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루마니아에 대한 국제적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인민들은 차우셰스쿠의 우파 퇴행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했으며, 차우셰스쿠는 비밀경찰 세쿠리타테를 육성해 자신에 대한 반대파를 억눌렀다. 또 유대인, 롬인, 헝가리인, 몰도바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모든 정책은 루마니아 공산당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서구권 혁명

1989년 남아메리카와 영국, 호주 등지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서구권 혁명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연쇄 혁명에 고무되었다. 그럼에도 차우셰스쿠는 동해 6월 4일 덩샤오핑 중화민국 총통이 노동자들의 쟁의를 짓밟은 베이핑 항쟁을 언급하며 민중의 반대를 얕잡아 보았다.

전개

1989년 12월 15일-21일

1989년 12월 15일, 몰도바 키시너우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화 반대와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지지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파업은 키시너우 전체로 퍼져나갔고 일부 노동자들은 몰도바 노농당을 자체적으로 조직해 베를린 조약기구의 개입을 요청하고자 했다. 이에 루마니아 당국은 몰도바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해, 최소한 66명이 사망하게 했다.

이 모습은 현장에서 취재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계열 방송국에게 고스란히 담겨 전세계로 알려졌으며, 12월 19일 코민테른은 루마니아 공산당의 회원 자격을 정지했고 국제연합은 차우셰스쿠 정권을 불법 괴뢰 정권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키시너우에서만 1만명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루마니아 내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의 최소 22.5%가 12월 18일-21일 사이 당을 탈당했다.

12월 21일


차우셰스쿠의 마지막 연설

3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입국한 차우셰스쿠는 대통령궁인 인민궁전에서 연설하여 시위를 잠재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는데, 민중은 차우셰스쿠의 연설에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야유를 퍼부으며 차우셰스쿠의 지지 기반이 완전히 상실되었음만을 보여주었다.

그와중에 터진 폭죽 소리를 시그널로 해 세쿠리타테가 민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발포로 인해 시위를 벌이던 민중 47명은 물론 행인 3명까지 숨졌으며 최소한 3,000명이 연행되었다. 이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전민적인 분노로 이어졌으며, 베를린 조약기구와 그 산하 군사조직인 국제 사회주의 노농해방군은 차우셰스쿠가 민중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판단하여 루마니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군사 작전 명은 12월의 돌풍 작전(Dezembersturm).

12월 22일

차우셰스쿠 대통령은 군에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바실레 밀레아 참모총장은 진압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밀레아 총장이 다음날인 22일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 발견되었다. 루마니아군은 극도로 동요하였고, 수뇌부는 쿠데타를 결정하였다. 같은 시기 루마이나 정교회 주교 테옥티스트, 루마니아 공산당 간부 이온 일리에스쿠 등을 주축으로 한 루마니아 구국전선은 자당을 루마니아의 유일한 사회주의 당이라 선포하고 차우셰스쿠를 대통령직책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하였다.

12월 23일

노동자들의 환호 속에 루마니아 영내에 진입하는 불가리아군 소속 전차

루마니아 국경 전역에서 라트 연방붉은 군대불가리아군이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1] 사실상 무혈입성하는 가운데, 루마니아군 신임 참모총장 빅토르 스턴쿨레스쿠는 전차 15대와 군인 400여명을 대동해 인민궁전으로 돌격했다. 진압군이 출동하였으나, 손쉽게 진압되었고 도리어 진압군의 전차가 시민들에게 탈취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2] 부쿠레슈티 경찰은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고 진압을 거부한 가운데, 사소한 세쿠리타테와 군의 충돌이 있은 후[3] 3시간만에 군은 부쿠레슈티를 장악했다.

이온 일리에시쿠 구국전선 서기장은 인민궁전에서 루마니아 공산당의 전면적인 제편과 차우셰스쿠 제명, 붉은 군대의 영내 주둔 허용 등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다. 민중은 일리에스쿠의 결정을 환호하며 자체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12월 24일

차우셰스쿠는 인민궁전이 장악되기 직전 빠져나와 헬리콥터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고자 했다.[4] 그러나 평소 차우셰스쿠에 불만을 품고 있던 헬기 조종사의 비협조적 태도로 망명에 실패했고,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남부에서 도주를 계속하며 버려진 헛간에서 숨어있다가 주민의 신고로 붙잡혔다.

차우셰스쿠는 즉각 체포되어 코민테른에 의하여 키예프에 있는 재판소로 보내졌다. 검사 측은 최소한 120명의 민간인에 무단발포한 혐의로 그를 향해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 변호사 측은 헤이그 군사재판소로의 이송이나 정신이상증세를 사유로 한 무기징역을 주장했으나, 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 25일

처형당하는 차우셰스쿠 부부

차우셰스쿠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졌다. 장소는 키예프 인근의 한 교도소로 알려져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차우셰스쿠는 교수형을 요구했으나 집행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인 군인 2명과 러시아인 군인 1명이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했다. 추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차우셰스쿠는 총알 세례를 받기 전 극도의 공포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와 아내 엘레나의 시신은 화장되어 드네프르 강에 뿌려졌는데, 사후 지지자들의 신성화를 우려하여 시신을 뿌린 장소는 공개되지 않았다.

12월 26일

코민테른은 루마니아의 사회주의가 복구되었음을 선포하고, 루마니아 공산당의 코민테른 회원자격을 회복시켰으며 국제적 제재 역시 해제되었다. 다만 사태의 중함을 고려하여 5년간 우크라이나 SRR, 불가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러시아 5개국이 루마니아의 "재 사회주의화"를 감독하기로 했다. 이온 일리에스쿠가 이끄는 구국전선은 빠르게 루마니아의 생산수단을 재국유화하였으며, 코민테른의 감독은 예정보다 1년 앞선 1993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평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루마니아 사건이 정변인지 혁명인지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있어왔다. 우선 혁명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설령 군인과 정치인들이 레짐 체인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동한 것은 민중이기 때문에 혁명이라 불러야한다고 주장한다. 또, 120명의 노동자 민중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정변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시위대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차우셰스쿠의 축출 및 사후 처리가 모두 군인과 정치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어, 혁명으로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일부 좌파적인 사학자들은 차우셰스쿠 정권의 핵심 요인들[5]이 혁명 이후에도 요직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혁명보다는 쿠데타의 성격에 더 가깝다고 평가한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공식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나, 라트 연방은 "정변"이라 표현하고 있고, 루마니아 내에서는 "12월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규 교육 과정에서는 해당 사건을 "쿠데타"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해당문서의 표제어 역시 "1989년 루마니아 쿠데타"로 정해졌다.

여담

  • 인민궁전은 혁명 이후에도 국회의사당 겸 서기장 집무실로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전시장 및 혁명박물관으로도 사용된다. 워낙 규모가 큰 건물이다보니 철거되지 않고 있다. 1997년 실제 철거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지만 직접 철거 비용만 하더라도 5,000만 레우[6]나 나올 것으로 예상되어 포기해버린 바 있다. 하지만 루마니아인들 대부분은 이 건물을 잊어버리고 싶은 15년 독점자본주의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 몹시 혐오하며[7], 끊임 없이 철거 요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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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마니아 국경경비대가 오히려 붉은 군대에게 손수 국경을 열어주는가 하면, 노동자들이 적기를 흔들며 붉은 군대를 맞이해 그들에게 먹을거리와 음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국제 사회주의 노농해방군은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민족감정을 고려해 붉은군대 헝가리군을 작전에서 배제시켰다. 주축은 폴란드군이 맡았다.
  2. 문서 상단의 사진이 그것이다. 해당 전차는 현재 루마니아 노동자 혁명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3. 사망자는 양측에서 6명 정도 발생했다.
  4. 리비아영국이었다는 말도 있다.
  5. 대표적으로 테옥티스트 루마니아 정교회 주교가 있다.
  6. 우리 돈으로 약 1억 4,600만원.
  7. 부쿠레슈티에서는 "인민궁전에서 일하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인민궁전을 볼 수 없으니 이 도시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이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