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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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만주-몽골 위기 1956 Mandschurei-Mongolei-Krise (독일어) 民國44年征服北方 (민국 44년 북방 정벌, 중국어) | |
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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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4월 1일 - 12월 30일 | |
장소 | |
몽골, 국경 일대 | |
원인 | |
중국의 영토완정 의욕 | |
교전 국가 | |
중국 | 만주 몽골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국제 사회주의 노농해방군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
지지 표명 국가 | |
북베트남 | 국제연합 |
지휘관 | |
장제스 후롄 지싱원 |
가오강 펑더화이 욤자깅 체뎅발 로솔린 라간 메흐메지트 로간 발터 모델 다그 함마르셸드 |
피해 | |
1,527명 전사 7,500명 부상 320명 포로 |
2,030명 전사 12,000명 부상 35,000명[1] 포로 |
민간인 7,800명 사망 총 사망자 12,000명 상당 | |
결과 | |
중국 측의 절반의 승리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멸망, 중국 복속 만주-몽골 국체 보존, 중국 대륙 완정 목표 실패 | |
영향 | |
신장위구르 자치구 성립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동시 국제연합 가입 |
개요
1956년 중국이 위구르, 만주, 몽골 지역을 병탄해 중화민국의 강역을 수복하는 영토완정을 이룩하고자 일으킨 전쟁. 결과적으로는 국경 내에서의 산발적인 교전으로 끝났으나, 12,000명 가까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전쟁으로도 분류된다.
배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트 연방군은 빠르게 러시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시베리아로 진격해 만주 작전을 통하여 만주, 몽골, 위구르 등을 해방시켰다. 중화민국군은 베이핑을 해방시키고 만주와 신장, 투바, 몽골 지역을 제외한 모든 국토를 되찾았다. 1946년,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과 제2차 국공내전을 일으켜 중국 전체의 공산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군에 비해 공산당군은 열세에 놓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주요 인사들이 전사하며 공산당군은 크게 퇴각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라트 연방군이 주둔하고 있던 만주 일대로 도주한 공산당군은 셴양(심양)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한편 라트 연방의 지원을 받고 있던 몽골의 처이발상 역시 몽골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위구르 제2공화국 역시 몽골-러시아 국경선에서 교전을 벌여가고 있었다. 이는 구 청나라의 영토 전체를 되찾고 싶었던 중국에 있어서는 큰 걸림돌이었다.
전개
1956년 4월 1일, 중국은 반국가세력 일소를 목적으로 만주와 몽골, 위구르 일대에서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중화민국 제2군이 동튀르키스탄에 진입했고, 사실상 군벌 수준으로 활동하고 있던 제2공화국 정부는 불과 일주일만에 항복했다. 이후 중화민국군은 몽골과 만주 일대 전역을 대상으로 진격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양측에서 약 5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주와 몽골은 신생 공화국이었던 러시아, 사회주의 종주국 라트 연방과 강한 군사적 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주-몽골 공격이 시작되자, 라트 연방군은 즉시 두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라트 연방 우크라이나 육군 제1군단을 만주로 파견했다. 라트 연방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두 국가에 물자를 지원했고, 군사 고문단도 도착했다. 중화민국군은 5월 1일까지 국경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내 베를린 조약 기구 군대에 반격당해 다시 국경 인근까지 후퇴했다.
하지만 라트 연방군은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싶었고, 군사적 지원에 집중하였으며 두 국가를 향해 국경선을 넘어 본토로 진격하지 말것을 주문했다. 국경 인근에서 양측에 의한 포격전이 이루어지며 민간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직접적인 국경 너머에서의 군사작전은 없었다.
국제연합은 중국의 침공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 조선, 스웨덴에서 약 500명 정도의 군인이 파견되었다. 다만 이들은 후방에서의 치안 안정과 물자 지원 등을 전담했고 군사적 충돌은 거의 없었다.
별다른 군사적 실익을 얻지 못한 중국군은 1956년 12월 철수를 결정했고, 연말까지 모든 군을 국경 너머로 후퇴시켰다. 그 다음해인 1957년 1월, 후하오터에서 잠정적인 휴전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군사위기는 종결되었다.
영향
1954년의 일본 위기와 더불어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최대의 군사, 외교적 충돌로, 인근의 여러 국가에 충격을 주었다. 우선 러시아의 경우, 재무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중국은 라트 연방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향해 몇차례의 포격을 가했고, 실제 9월 20일 중국의 포격으로 인해 역무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군이 없었기에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1958년 재무장을 선언한 후, 국제연합과 베를린 조약기구의 감독 하에 침략이 아닌 방어만 할 수 있는 준군사조직인 러시아 방위대를 창설했다. 이후로도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완전한 침략 가능 군대를 만들어야한다는 정상국가론이 러시아 내에서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독단적인 군사작전에 무척이나 반대했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이자 고립주의자였던 토머스 E. 듀이는 최대한 라트 연방을 군사적으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지만 중국의 군사 행동으로 인해 이것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듀이는 장제스를 비난하며 미중결렬을 야기했다. 퇴임을 앞둔 듀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져, 1956년 대선에서 대라 강경파인 W. 애버럴 해리먼 뉴욕주지사가 승리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당은 미국을 지지한 이승만파와 중국을 지지한 김홍일파로 분열되었고, 결국 1956년 총선거를 앞두고 독립자유당(우남파)과 민주자유당(일서파)로 나뉘어 총선을 치루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조봉암 수상의 사회민주당은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총선 패배가 예상되었지만 뜻밖의 안보적 위기로 인한 전국민적 단결과 야권의 분열로 인하여 오히려 종전보다도 더 큰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하여 52년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고, 자유당은 1996년 해체되기까지 1994-1995년의 짧은 집권기를 제외하면 단 한번도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담
- 이때 멸망한 동튀르키스탄은 1989년 동튀르키스탄 독립전쟁을 통해 33년만에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 2012년 중국이 몽골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면서, 두 국가는 2013년 정상급 회담을 가진 후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의 경우, 중국이 여전히 만주 영유권을 주장하는 바, 외교관계 수립은 요원하다. 단 만주는 최근 영토완정을 포기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한 상태이다.
- ↑ 이중 33,000명은 항복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소속 병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