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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30% | | width="30%" | ''제헌국회 출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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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 | ! colspan="2" style="background: #CC0000; color: #ffd700" | 제1-3대 조선공산당 총비서<br>{{글씨 크기|14|박헌영}}<br>朴憲永 <nowiki>|</nowiki> Pak Hon-y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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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div style="margin: - | ! colspan="2" |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박헌영 프로필.jpg]]</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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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도 (민국 38)|충청도]] [[대흥군 (민국 38)|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br>(現 [[충청남도 (민국 38)|충청남도]] [[예산군 (민국 38)|예산군]] [[신양면 (민국 38)|신양면]] 청신로 379) | | [[충청도 (민국 38)|충청도]] [[대흥군 (민국 38)|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br>(現 [[충청남도 (민국 38)|충청남도]] [[예산군 (민국 38)|예산군]] [[신양면 (민국 38)|신양면]] 청신로 3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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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공립보통학교 <sub>(졸업)</sub><br>[[경기고등학교 (민국 38)|경성고등보통학교]] <sub>(졸업)</sub><br>국제레닌학교 | | 대흥공립보통학교 <sub>(졸업)</sub><br>[[경기고등학교 (민국 38)|경성고등보통학교]] <sub>(졸업)</sub><br>국제레닌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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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cm | | 161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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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l>원산시 갑</del><ref name="내란"></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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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CC0000; color: #ffd700 | 의원 대수 | ! style="background:#CC0000; color: #ffd700 | 의원 대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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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CC0000; color: #ffd700" | | ! style="background:#CC0000; color: #ffd700" | 주요 경력 | ||
|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br>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br>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br>경성콤그룹 지도자<br>제1·2·3대 조선공산당 총비서 | |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br>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br>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br>경성콤그룹 지도자<br>제1·2·3대 조선공산당 총비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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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원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건국 초반에는 연합군정과 대한민국 체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나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체제에서 소외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명 "배제 발언"<ref>"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배제한다."</ref>을 시작으로 친소 극좌 세력에 대한 주류 정치세력들의 공세가 강화됨과 동시에 토지개혁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인하여 노농계급의 공산당 지지도가 하락하자 점차 발언의 수위를 높이며 반체제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 이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원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건국 초반에는 연합군정과 대한민국 체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나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체제에서 소외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명 "배제 발언"<ref>"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배제한다."</ref>을 시작으로 친소 극좌 세력에 대한 주류 정치세력들의 공세가 강화됨과 동시에 토지개혁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인하여 노농계급의 공산당 지지도가 하락하자 점차 발언의 수위를 높이며 반체제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 ||
1950년 민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조선공산당의 의석수는 기존 57석에서 절반 이상을 상실한 21석으로 감소하였으며 차기 국무총리로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김구가 지명되었다. 그동안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김구의 총리 지명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게는 사실상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총선 참패에 대하여 당내에서 박헌영 책임론이 대두되고 당내 온건파에 해당하던 연안파<ref>김무정, 김두봉 등.</ref>가 집단탈당하여 | 1950년 민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조선공산당의 의석수는 기존 57석에서 절반 이상을 상실한 21석으로 감소하였으며 차기 국무총리로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김구가 지명되었다. 그동안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김구의 총리 지명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게는 사실상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총선 참패에 대하여 당내에서 박헌영 책임론이 대두되고 당내 온건파에 해당하던 연안파<ref>김무정, 김두봉 등.</ref>가 집단탈당하여 신민당<ref>이후 인민당과 합당하여 사회당을 창당한다.</ref>을 창당하자 철웅성과 같던 박헌영의 당내 리더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사망 === | === 사망 === | ||
2024년 10월 29일 (화) 10:43 기준 최신판
책임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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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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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5월 28일 | ||||||||||||||||||||||||||||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청신로 379) | |||||||||||||||||||||||||||||
사망 | 1995년 5월 19일 (향년 94세) | ||||||||||||||||||||||||||||
알바니아 티라나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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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 소비에트 연방, 알바니아의 반수정주의 공산주의 계열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조공 반란사태의 전범.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로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유명했으나 정부 수립이후에는 소련과 일공을 등에 업고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시도한 전범이다. 봉기 실패 이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망명 조선공산당을 이끌었으나 베리야 집권이후 문화대혁명 노선에 반발하여 당에서 쫒겨났고 이후 엔베르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자신을 따라 온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재건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다. 호자 사망이후 알바니아가 민주화 되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95년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광복 이전
1900년 5월 28일 충청남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어머니 이학규(李學圭)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 대흥공립보통학교 졸업후 우수한 성적을 바탕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도 하였다. 1919년 2월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을 경험하며 화요파에서 활동하다가 상하이에 가게 된다.
상하이에서 활동을 하던 와중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가한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려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뤘다. 석방 이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취직하였으며 화요파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기자로 재직하던 와중 주세죽과 결혼식을 올렸으나 이듬해에 일제에 의해 기자직에서 해임되고 만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당시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와중 재판정에 달려든 이후 심각한 수준의 폭행을 당하여 인분을 섭취하는 등의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보석으로 1927년 11월 22일에 석방되었으며 1928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아내와 함께 탈출해 버렸다. 1928년에는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였으며 29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1년 상해로 돌아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국내로 반입시겼으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강화된 일제의 단속에 의해 검거되어 1934년 국내로 압송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고 1939년 형기를 1년 남기고 가석방되었다. 1939년 12월 12일에 경성콤그룹에 영입되어 기관지 집필을 맡았으며 1941년 경성콤그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전라남도 광주로 도피하여 태평양 전쟁 기관동안 노동자로 위장하여 은거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중소연합군이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고 미군이 제주도로 상륙하여 한반도가 해방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 출신들과 함께 조공 재건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10월 16일 조선공산당의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이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건준과 각지의 인민위원회가 자체정부 수립이 아닌 삼국연합군정에 대한 협조와 좌우합작 과도정부 수립으로 노선을 정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 및 일부 지역 인민위원회와 함께 건준에서 이탈하였다.
이후 우익세력들이 임시정부와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집하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민족주의 좌파성향의 조선신민당, 중도좌익 성향의 최대 정치조직이던 조선인민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민전)을 조직하여 단일대오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좌우합작에 우호적이던 인민당과는 달리 박헌영은 우익세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우며 사실상 합작을 반대하고 있었고 연합군정의 지지를 받던 여운형이 우익과의 합작을 위해 온건방침을 정하자 박헌영은 이에 반발하여 결국 민전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원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건국 초반에는 연합군정과 대한민국 체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나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체제에서 소외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일명 "배제 발언"[3]을 시작으로 친소 극좌 세력에 대한 주류 정치세력들의 공세가 강화됨과 동시에 토지개혁과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인하여 노농계급의 공산당 지지도가 하락하자 점차 발언의 수위를 높이며 반체제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950년 민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조선공산당의 의석수는 기존 57석에서 절반 이상을 상실한 21석으로 감소하였으며 차기 국무총리로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김구가 지명되었다. 그동안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보다도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김구의 총리 지명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게는 사실상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총선 참패에 대하여 당내에서 박헌영 책임론이 대두되고 당내 온건파에 해당하던 연안파[4]가 집단탈당하여 신민당[5]을 창당하자 철웅성과 같던 박헌영의 당내 리더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