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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정우회'''는 [[대한민국 (아름다운 나라)|대한민국]] | '''호헌정우회'''는 [[대한민국 (아름다운 나라)|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의 단명한 정당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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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아름다운 나라)|이승만]] 총통이 [[1차 개헌|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민주국민당]] 내 일부 탈당파가 창당하였다. | [[이승만 (아름다운 나라)|이승만]] 총통이 [[1차 개헌|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민주국민당]] 내 일부 탈당파가 창당하였다. | ||
민주국민당 국회의원이었던 | 민주국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 (아름다운 나라)|김대중]]은 이승만 정부와 민국당 지도부가 3연임 제한을 철폐한 헌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이에 반발해 일부 국회의원과 함께 개헌 저지를 시도했다. 이들은 호헌계로 불렸다. 하지만 호헌계의 개헌 저지는 결국 실패했고 탈당을 감행했다. 호헌계 신당의 당명은 '호헌정우회', 약칭 호정회로 정해졌고 총무에는 김대중이 추대되었다. | ||
김대중은 호정회의 약한 당세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다른 정당과의 협력과 중진 원로 영입이 바로 그것이었다. | |||
애당초의 호정회는 [[전진한]]의 [[노농당]]과 공동으로 단체교섭회(교섭단체)를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경제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실패했다.<ref>김대중은 선성장 후복지를 주장한 반면 전진한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 등 급진적인 정책의 즉시 도입을 주장했다.</ref> 그러자 호정회는 교섭 대상을 [[한국민주당#1949년 한국민주당|신 한민당]]<ref>1945년에 창당된 구 한민당과 구별하기 위해 신 한민당이라고 부른다.</ref>으로 바꾸었다. 한민당과 호정회 양쪽 모두 보수 성향이었고 총무인 김대중이 한때 구 한민당 소속이었기에 양측의 협력은 성사되었다. | |||
또한 호정회에는 거물급 인사가 없었기에, 김대중은 중도 성향의 명망 있는 원로를 영입하려 했다. 마침 민국당의 중도파 원로 김규식이 개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호정회는 김규식을 주석으로 추대했고 김규식은 이를 수락했다. 김대중은 또다른 중도파 거물인 [[안재홍]] 역시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민정장관 시절 구 한민당에게 온갖 비방을 당했던 안재홍은 김대중이 신 한민당과 협력하려 하자 합류를 거부했다. 이후 [[장면 (아름다운 나라)|장면]] 전 외무부장관 겸 부총리를 차기 총통으로 밀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난 민국당 중진 [[오위영]], [[양일동]]도 호정회에 합류했다. | |||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로는 군소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었고 당 지도부는 기타 야당들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이후 [[근로인민당]], [[한국민주당]], [[조선민주당]], [[노농당]]과 합당하여 [[자유당 (아름다운 나라)|자유당]]을 [[자유당 창당|창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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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 역시 불명이었으나 2022년 6월, [[중앙일보]]가 호정회 창립대회 당시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위의 사진은 당시 흑백 사진에 찍힌 로고에 색을 입힌 것. 다만 '호헌'부분은 사진상의 문제인지 잘려나가있어 '정우회'부분만 남았다. | 로고 역시 불명이었으나 2022년 6월, [[중앙일보]]가 호정회 창립대회 당시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위의 사진은 당시 흑백 사진에 찍힌 로고에 색을 입힌 것. 다만 '호헌'부분은 사진상의 문제인지 잘려나가있어 '정우회'부분만 남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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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7일 (금) 15:2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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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민당 | → | 호헌정우회 | → | 자유당 |
개요
호헌정우회는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의 단명한 정당이다.
역사
이승만 총통이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민주국민당 내 일부 탈당파가 창당하였다.
민주국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이승만 정부와 민국당 지도부가 3연임 제한을 철폐한 헌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이에 반발해 일부 국회의원과 함께 개헌 저지를 시도했다. 이들은 호헌계로 불렸다. 하지만 호헌계의 개헌 저지는 결국 실패했고 탈당을 감행했다. 호헌계 신당의 당명은 '호헌정우회', 약칭 호정회로 정해졌고 총무에는 김대중이 추대되었다.
김대중은 호정회의 약한 당세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다른 정당과의 협력과 중진 원로 영입이 바로 그것이었다.
애당초의 호정회는 전진한의 노농당과 공동으로 단체교섭회(교섭단체)를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경제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실패했다.[1] 그러자 호정회는 교섭 대상을 신 한민당[2]으로 바꾸었다. 한민당과 호정회 양쪽 모두 보수 성향이었고 총무인 김대중이 한때 구 한민당 소속이었기에 양측의 협력은 성사되었다.
또한 호정회에는 거물급 인사가 없었기에, 김대중은 중도 성향의 명망 있는 원로를 영입하려 했다. 마침 민국당의 중도파 원로 김규식이 개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호정회는 김규식을 주석으로 추대했고 김규식은 이를 수락했다. 김대중은 또다른 중도파 거물인 안재홍 역시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민정장관 시절 구 한민당에게 온갖 비방을 당했던 안재홍은 김대중이 신 한민당과 협력하려 하자 합류를 거부했다. 이후 장면 전 외무부장관 겸 부총리를 차기 총통으로 밀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난 민국당 중진 오위영, 양일동도 호정회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로는 군소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었고 당 지도부는 기타 야당들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이후 근로인민당, 한국민주당, 조선민주당, 노농당과 합당하여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성향 및 특징
정치적 스펙트럼은 중도부터 중도 우파까지 포진하여있었다.
짧은 활동기간과 약한 당세로 인해 대중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
상징
표어는 확인되지 않으며 상징색 역시 불명이었으나 2003년 김대중이 남색을 주로 썼다고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로고 역시 불명이었으나 2022년 6월, 중앙일보가 호정회 창립대회 당시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위의 사진은 당시 흑백 사진에 찍힌 로고에 색을 입힌 것. 다만 '호헌'부분은 사진상의 문제인지 잘려나가있어 '정우회'부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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