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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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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창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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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당 합당 | ||||
파일:5당합당.jpg |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근민당 당수 조봉암, 한민당 수석총무 김성수, 호정회 주석 김규식, 노농당 주석 전진한, 조민당 당수 조만식. |
개요
1957년 9월 7일 야권 주요 5개 정당이 합당하여 자유당을 창당한 사건.
전개
배경
여당인 민주국민당이 압도적인 의석으로 날치기 개헌을 통과시키자 야당들은 힘을 모을 필요를 느낀다. 그리하여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이 처음 야권 통합을 제의하였고, 이에 한국민주당, 조선민주당, 노농당, 호헌정우회가 호응하면서 야권 통합은 급물살을 탄다.
처음에 야권통합을 제의한 당도, 야당 중 의석이 가장 많은 당도 근로인민당이었기 때문에, 근민당이 야권통합을 주도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김언봉 간첩 사건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1차 개헌 직전에 조선로동당 잔당에 의한 아웅산 묘소 테러가 있었는데, 근민당의 최고위원인 김언봉[1]이 통합 논의 중 이 테러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이 근민당 당수에서 사퇴했고 근민당의 발언권이 크게 약해진다.
계속되는 노력
암초에도 불구하고 야권 통합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근로인민당의 경우 김언봉 간첩 사건으로 인해 당에 씌워진 간첩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반이승만 보수 야당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통합 야당이 반드시 필요했다. 통합을 우익 세력이 주도하게 되면서 최대의 우익 정당이었던 한민당의 인사가 당수로 추대될 수 있었으나 좌익 세력이 아주 극렬히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타협적 우파인 조선민주당에 당수 자리를 주되 집단지도체제를 도입, 각 정당 대표가 최고위원을 맡고 당수와 최고위원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가 당 의사결정을 통할하여 당수의 폭주를 방지하기로 협의했다. 5당 회의에서 각 당의 대표자들은 조만식을 초대 당수로 추대하기로 합의했고, 1957년, 자유당 (아름다운 나라)가 창당된다.
다만 근로인민당, 노농당의 범좌파의 세력이 크게 약해지고 반대급부로 범우파인 조선민주당과 한국민주당의 세력이 강해져 신생 자유당은 우파 정당이 되었다. 보수양당제
의의
현대 자유당계 정당의 시조인 자유당이 창당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훗날 자유주의 세력의 대부가 되는 김대중 역시 이 사건을 통해 자유주의 정당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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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봉과 헷갈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