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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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는 핀란드-러시아 전쟁/러시아-핀란드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겨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자 다급해진 핀란드는 독일제국의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한다.
정식으로는 핀란드-러시아 전쟁/러시아-핀란드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겨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자 다급해진 핀란드는 독일제국의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한다.
== 배경 ==
핀란드는 1150년 제1차 핀란드 십자군 이래로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고, 1809년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핀란드 내전에 돌입했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군이 독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했다.
1920년 핀란드와 러시아는 두 국가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타르투 조약(Treaty of Tartu)을 맺었다. 핀란드는 도시 페차모(Petsamo)와 북극해에 접한 항구 하나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국경 갈등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러시아-핀란드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빈코프는 러시아 내전 동안 핀란드 지역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그는 이곳을 계속 탐냈다. 1930년대 초반 성공적으로 러시아 정상화를 이룩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궈낸 그의 눈에 핀란드는 먹기 딱 좋은 놓치기 아까운 고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광대한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사빈코프는 어떻게든 영토를 확장시켜야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는 프랑스 코뮌이 독일을 치자 독일이 북유럽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고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할 목적으로 핀란드 전체를 다시 러시아가 차지하려고했다.
1939년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 등을 명목삼아 핀란드에 대대적인 영토 할양 및 조차를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핀란드에게 제시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핀란드와 소련 국경 부근의 주요 공업지대 카리알라(Karjala)와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 수르사리(Suursaari)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할양.<ref>핀란드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를 비롯한 영토 상당수를 내놓으라는 그야말로 날강도 짓이다.</ref>
* 투르쿠(Turku),<ref>핀란드의 옛 수도이다.</ref>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Helsinki),<ref>현재 핀란드의 수도이다. 이 당시에도 인구와 도시 규모에 있어 핀란드의 최대 도시였다.</ref> 비푸리(Viipuri)<ref>핀란드의 유서 깊은 제2의 도시로 당시 핀란드 경제의 중추인 남부 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ref> 등 발트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 및 조차 권리 보장.<ref>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기간을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그 뒷일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ref>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은 러시아 대변인에게 "안 되오."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러자 러시아 측 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러시아군이 말할 것이오."라고 반 협박조로 대답한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사빈코프는 핀란드가 요구를 거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했고, 회담이 결렬되자 즉각 전쟁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이 시점에서 이미 핀란드를 병탄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핀란드는 당시 [[제2차 벨트크리그 (빌레펠트)|2차 벨트크리그]]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독일, 스웨덴에 도움을 청하여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어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9년 11월 26일, 러시아-핀란드 국경 지대의 마이닐라(Mainila)에서 러시아는 핀란드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마치 자신들의 국경 수비 초소가 핀란드군에게 포격을 당한 것 마냥 위장한 자작극을 벌였다.<ref>당시 핀란드군이 배치했던 야포 중 마이닐라에 사거리가 닿는 장소에 배치된 야포는 없었고, 러시아의 역사가 파벨 압테카르가 러시아군의 일일 보고를 열람한 결과 마이닐라 포격 사건 당시 러시아군의 주장과는 달리 인명 손실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키타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해당 사건은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서술했고, 1994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해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전쟁 도발 행위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했다.</ref> 이에 러시아는 핀란드군의 포격에 대한 반격을 구실삼아 4일 뒤 핀란드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 전개 ==
=== 핀란드군의 대비 ===
=== 러시아군의 진격 ===
=== 전세역전 ===
=== 러시아군의 재반격 ===
=== 핀란드군의 반격과 종전 ===
== 결과 ==
== 이후 ==
== 평가 ==
== 기타 ==
== 관련 링크 ==
== 매체에서 ==
== 둘러보기 ==

2023년 3월 30일 (목) 17: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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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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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공격측 방어측
1939년
독일 침공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본토 항공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러시아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딜 계획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벨기에
네덜란드
브뤼셀 전투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벨기에
1940년
아일랜드 전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아일랜드
독일제국
켈트 해 해전 독일제국
아일랜드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노르웨이 코뮌
포르투갈 침공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포르투갈 왕국
캐나다 자치령
프랑스 공화국
아헨 전투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독일제국
1941년
라인 강 대공세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독일제국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프랑스 코뮌 독일제국
바그라티온 작전 러시아국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국
독일제국
도나우 연방
우크라이나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발트연합공국
리투아니아
핀란드 왕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차르국
겨울전쟁 러시아국 핀란드 왕국
독일제국
함부르크 공방전 프랑스 코뮌
브리튼 연방
스페인 사회주의 공화국
노르웨이 코뮌
독일제국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우크라이나
도나우 연방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베를린 공방전 러시아국 독일제국
폴란드 왕국
벨로루시아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겨울전쟁
Winter War (영어)
Talvisota (핀란드어)
Зимняя война (러시아어)
Winterkrieg (독일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핀란드군
핀란드군에 의해 파괴된 러시아군의 T-26 전차
겨울전쟁에서 활약한 저격수 시모 해위해
날짜 1939년 11월 30일~1945년 3월 13일
장소 핀란드 전역, 러시아 카렐리아 일대
교전국 핀란드 공화국
사미 공화국
독일제국
러시아국
지휘관 퀴외스티 칼리오
리스토 뤼티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영향
러시아의 영토 상실
사미족의 자치권 확대
병력 병력 25만~34만 명
전차 32대
항공기 114대
병력 42만~99만 명
전차 2,514~6,541대
장갑차
718~1,691대
항공기 3,880대
피해규모 전사/실종 2만 5천 명
부상 4만 5천여 명
포로 1,600~2천여 명
공습으로 민간인 3,467명 사망
전차 30여 대 격파
항공기 123대 격추
전사/실종 12만 7천 명
부상 18만 명
포로 5천여 명
전차 1,200~3,543대 격파
항공기 261~515기 격추
결과
핀란드의 승리

개요

그냥 내놓으라고 해서 말을 안 들으면 목소리를 좀 높이면 될 것이고, 고함을 질러도 안 되면 총을 몇 발 쏘면 돼. 그저 그뿐이야. 이건 무척 쉬운 일이라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1939년 11월 30일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 1945년 3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간주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노분전쟁(露芬戰爭)으로 불렀다.

정식으로는 핀란드-러시아 전쟁/러시아-핀란드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겨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자 다급해진 핀란드는 독일제국의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한다.

배경

핀란드는 1150년 제1차 핀란드 십자군 이래로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고, 1809년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하고 핀란드 내전에 돌입했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군이 독일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했다.

1920년 핀란드와 러시아는 두 국가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타르투 조약(Treaty of Tartu)을 맺었다. 핀란드는 도시 페차모(Petsamo)와 북극해에 접한 항구 하나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국경 갈등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러시아-핀란드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빈코프는 러시아 내전 동안 핀란드 지역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그는 이곳을 계속 탐냈다. 1930년대 초반 성공적으로 러시아 정상화를 이룩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궈낸 그의 눈에 핀란드는 먹기 딱 좋은 놓치기 아까운 고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광대한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사빈코프는 어떻게든 영토를 확장시켜야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는 프랑스 코뮌이 독일을 치자 독일이 북유럽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거라고 생각하고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할 목적으로 핀란드 전체를 다시 러시아가 차지하려고했다.

1939년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 일대의 안전 확보 등을 명목삼아 핀란드에 대대적인 영토 할양 및 조차를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핀란드에게 제시한 요구는 다음과 같다.

  • 핀란드와 소련 국경 부근의 주요 공업지대 카리알라(Karjala)와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을 포함해 약 2,300km2에 해당되는 영토의 할양.
  • 수르사리(Suursaari) 섬 등 핀란드 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를 할양.[1]
  • 투르쿠(Turku),[2] 코트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Helsinki),[3] 비푸리(Viipuri)[4] 등 발트해에 속한 보트니아 만과 핀란드 만을 접하고 있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권 및 조차 권리 보장.[5]

이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은 러시아 대변인에게 "안 되오."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그러자 러시아 측 대표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이제 내 역할은 끝났소. 나머지는 러시아군이 말할 것이오."라고 반 협박조로 대답한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사빈코프는 핀란드가 요구를 거절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했고, 회담이 결렬되자 즉각 전쟁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이 시점에서 이미 핀란드를 병탄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핀란드는 당시 2차 벨트크리그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독일, 스웨덴에 도움을 청하여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일이 잘 안되어 결국은 실패하였다. 그리고...

1939년 11월 26일, 러시아-핀란드 국경 지대의 마이닐라(Mainila)에서 러시아는 핀란드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마치 자신들의 국경 수비 초소가 핀란드군에게 포격을 당한 것 마냥 위장한 자작극을 벌였다.[6] 이에 러시아는 핀란드군의 포격에 대한 반격을 구실삼아 4일 뒤 핀란드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전개

핀란드군의 대비

러시아군의 진격

전세역전

러시아군의 재반격

핀란드군의 반격과 종전

결과

이후

평가

기타

관련 링크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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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핀란드의 육지와 해상의 요충지를 비롯한 영토 상당수를 내놓으라는 그야말로 날강도 짓이다.
  2. 핀란드의 옛 수도이다.
  3. 현재 핀란드의 수도이다. 이 당시에도 인구와 도시 규모에 있어 핀란드의 최대 도시였다.
  4. 핀란드의 유서 깊은 제2의 도시로 당시 핀란드 경제의 중추인 남부 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5. 대부분 약 30년에서 40년 가량이었으며 기간을 준수할 것인가도 미지수였기에 그 뒷일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6. 당시 핀란드군이 배치했던 야포 중 마이닐라에 사거리가 닿는 장소에 배치된 야포는 없었고, 러시아의 역사가 파벨 압테카르가 러시아군의 일일 보고를 열람한 결과 마이닐라 포격 사건 당시 러시아군의 주장과는 달리 인명 손실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니키타 흐루쇼프도 회고록에서 해당 사건은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서술했고, 1994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해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전쟁 도발 행위의 일부였다는 점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