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애당초 조선을 식민지화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의 근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며 조선의 식민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해군의 의견을 따라 남방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조선은 북방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북방으로 진출하려는 조선과 남방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은 공통적으로 청나라를 상대해야만 했다. 양측의 공동의 적이 생기면서, 조선과 일본은 1892년 비밀리에 동맹조약을 체결했다.[1]
새로운 농경기술은 조선에서의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렸으나 인구가 천만이 훌쩍 넘어가며 한반도의 인구압은 극한에 도달했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청나라 영토인 간도에 정착했다.
간도의 조선인들은 청국인들과 농토를 두고 마찰을 빚었다. 이에 청나라는 지역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영[2]을 파견하였고 조선 역시 간도의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개 육군연대를 파견했다. 간도방어사로 임명된 참장(소장) 이용익이 간도에 주둔한 청군을 기습공격해 간도 밖으로 몰아내자 청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하며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합의를 거친 뒤 청에 공동으로 선전포고했다. 동시에 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폐지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한국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청나라는 당황하였으나 곧 대규모 병력을 준비해 간도를 공격한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만주에서 일어난 내전. 군부 쿠데타로 차이윈성 수상 등 여러 정부 요인들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고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일부 급진적 사회주의 세력, 한족 민족주의자들, 몽골 왕공족 그리고 기타 소규모 반정부 세력이 봉기하여 발생하였다. 만주 정부는 1956년 공식적으로 내전의 종료와 반군 토벌의 완성을 선언하였으나 1960년대까지 일부 반군 세력이 잔존해 테러 활동을 이어갔다.
만주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난 내부의 환란이라고 하여 갑오내란(甲午內亂)이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만주 내전(Manchurian Civil War)이라고 한다. 한국 정부는 만주 정부의 요청에 따라 만주 내란이라고 표현한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맙네, 자네들.김창암이 자신을 도와준 청년들에게 한 말.[3]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4],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