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여운형이 본인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사민당에서는 차기 대표, 즉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임시 전당대회가 치루어졌다.
전당대회에 참가한 조봉암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총리 대행을 맡고 있던 현직 부총리 조용은이었다. 64세의 조용은은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 반면 53세의 조봉암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다 조씨였기에 언론에서는 그 전당대회를 '양조대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당대회는 여운형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의 여파로 치러진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당원들은 조용은보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조봉암을 더 선호했고 결선투표에서 57%를 득표한 조봉암이 사민당 대표에 선출되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공산당은 조국을 완전히 쏘련의 괴뢰화하여 민족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칭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쏘련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등 맹동을 하고 있습니다.[5]1941년, 태평양전쟁 중 라디오 연설
'국가에 의한 자유'란 무엇인가. 각 개인이 자신의 정당한 꿈을 펼치는 데에 있어 국가가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국가에 의한 자유'입니다.1950년, 국민원 원무영임 기조 연설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1953년, 전승절 8주년 기념 연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6], 이것을 가리켜서 한국의 사민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1957년, 국무총리 퇴임 연설
김정일의 자식인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모두 예술인이 되어 아빠, 엄마, 세 자녀 모두가 예술인인 예술인 가족이다.
아내 고용희는 1952년생으로, 전통무용가였다. 국립전통무용단에서 활동하였으며 2003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받았다. 2014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장남인 김정철은 1981년생으로, 기타리스트이다. 현재 영국인 여자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영국에서 거주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세간이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다.
1984년생인 차남 김정은은 김정일을 따라 영화감독이 되어 《탈북》, 《핵미사일》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가 감독을 맡은 영화들 중에서는 큰 흥행에 성공한 것들도 더러 있지만 사회비판적 시각이 다분했던 김정일의 작품들보다는 상업성이 강하다고 한다.
1988년생인 장녀 김여정은 작가 겸 사회평론가이다. <88년생 김지영>, <삶은 소대가리> 등의 소설을 썼다. 아버지인 김성주와 정치적으로 바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주로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보수 성향의 일간지에 사회적 이슈나 문학을 주제로 칼럼을 쓴다.
강덕재 푸이는 청의 11대 황제 광서제의 이복동생 순친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숙부 광서제가 사망하자 만2세의 나이로 서태후에 의해 청나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선통. 그런데 푸이다 선통제로 즉위한지 일주일만에 후견자였던 서태후가 사망하면서 푸이의 입지가 흔들렸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푸이는 권력자 위안스카이의 압박에 퇴위당했으나 민국이 청나라 황실을 예우하기로 하면서 청나라 소조정의 형태로 남아있는 자금성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에 여러 군벌들이 반대하여 호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위안스카이가 퇴위하고 곧 사망했지만 여기저기에서 군벌들이 할거하며 중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이러한 혼란을 틈타 장쉰(장훈)으로 대표돠는 복벽파가 푸이를 다시 황제에 옹립하니 이것이 바로 장훈복벽이다. 하지만 민국 국무총리인 된치루이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접수하면서 푸이는 복위 12일만에 다시 폐위되었다.
여러 군벌들이 각종 쿠데타를 일으키며 베이징의 주인은 계속해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푸이는 모든 예우를 폐지당하고 자금성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황릉인 동릉까지 계획적인 도굴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에 위성국을 세우고자 하던 한국이 육화원 요원을 보내 푸이에게 접근했고 푸이는 육화원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천진의 한국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주천진한국공사였던 변영태는 푸이에게 만주에 새 국가가 건국될 것이니 그 나라의 군주가 되어달라고 설득한다. 푸이는 중국 국민정부에 반감을 거지고 있었기에 변영태의 요청에 동의하였고, 곧 한국 특수부대의 도움으로 만주로 탈출하였다. 때마침 복벽파의 거두 정샤오쉬도 육화원 요원들의 모시기 공작으로 막 만주에 도착한 참이었다.
1927년 만주사변에서 복벽파인 전만연합임시정부가 승리하여 만주국이 건국되었고 푸이는 만주국 초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베이징으로 진공하여 청을 복원하고 '무도한 반역자들'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곧 현실을 깨닫고 만주의 통치차로 만족하였다.
1939년, 만주국의 기틀을 다진 초대 내각총리대신 정샤오쉬가 급사하자 푸이는 입법원 다수당인 민건회의 요청에 따라 방계 황실에 속해있던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를 새 수상에 지명했다. 입법원에서 시치아가 수상에 선출되었지만, 시치아는 정샤오쉬의 급사 이후 민건회가 보수파의 민심을 잡기 위해 내세운 인물일 뿐 아주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고 그저 당 지도부에 의해 낙점된만큼 정국 장악력도 없었다. 평시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상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임명된지 반년만에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해버렸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군 앞에 시치아 내각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사실상 내각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강덕제는 시치아를 황궁으로 호출해 노발대발 화를 낸 다음 그 자리에서 해임했다. 그러고는 군인 출신인 장징후이를 불러들여 수상에 임명한 뒤 전시내각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후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오자 만주국 정부와 함께 신징을 탈출해 심양, 북안동을 거쳐 평양까지 대피하였다.
1941년 말에 소련과의 평화조약이 맺어지면서 신징으로 돌아왔지만 만주의 현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황궁이 불타면서 한동안은 다른 지역에서 지내야 했다. 장징후이 내각이 시행한 국가중건총체규획에 거금을 지출해 만주의 전후복구를 도왔다.
정샤오쉬와 막역한 사이였다. 정샤오쉬는 강덕제가 유아기에 청나라 황제였던 시절부터 공화파로부터 황정을 지키려고 애쓴 것도 있을 뿐더러 신생 만주국의 안정화에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마웠던 것인지 강덕제는 정샤오쉬의 크고작은 경조사를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정샤오쉬, 장징후이와 함께 만주 건국 삼걸이라 불리지만 정말로 강덕제가 나머지 두 사람과 동급의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샤오쉬는 사상, 잔징후이는 군사 면에서 만주국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지만 강덕제는 건국 과정에서 구심점의 역할 외에는 이렇다 할 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호는 영화(榮華)로, 영(榮)이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연호인 영화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영(榮)을 영화 영으로 해석할 때다. 이 경우 영화(榮華)는 '번영하고 빛나다'라는 의미로, 국가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만약 영(榮)을 꽃 영으로 해석한다면 영화(榮華)는 '꽃이 빛나다'라는 의미로, 영화제 사인 개인을 가르킨다. 연호를 지을 때부터 두 가지 모두로 해석될 수 있도록 지었다.
만주국 헌법상 만주국 황제는 만주군의 명목상 통수권자이자 최고 계급인 대원수를 겸임하며 동시에 만주국 황족 황위계승자는 정규군사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영화제는 중학생 때 황위를 계승했고 규정에 따라 공군군관학교에 진학헤 군관생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뮨제가 생겼더. 만주군 군관생도는 자동으로 준위의 계급을 가지고 졸업 후 임관과 동시에 소위가 되는데, 영화제는 황제를 겸하고 있으므로 자동으로 대원수 직함을 달게 되어 준위 겸 대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헌법은 황위계승 시에 계승자가 이미 정규군사교육을 이수한 상황을 가정하고 작성된 것이기에 영화제의 사례에서는 위계가 꼬여버렸다. 이로 인해 영화제는 정식 대원수 타이틀을 아직 쓰지 않으며 예비 대원수 만주군 통수권을 행사하지 않고있다.
내 동주 중학교 터는 잘못 되어 있다
어서 세계관 런칭해야
잘 보고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