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79년 인민경제계획 수치 달성을 호소하는 선전 포스터 |
인민경제발전칠개년계획 / 人民經濟發展七個年計劃
Seven-year plans for the development of the people's economy
1956년부터 조선 정부의 지도 하에 실시되고 있는 국가주도 경제 발전 계획.
배경
조선 최초의 개년계획은 1950년 조선전쟁의 종전 이후 시행된 인민경제복구3개년계획(人民經濟復舊三個年計劃)이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시행된 3개년 계획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선 경제를 복구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시행된 경제 발전 계획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와 주민들의 대중동원체계 덕분에 해당 정책의 시행 이후 조선의 국민소득증가율은 30.1%, 공업생산증가율은 41.8%로 목표치에서 약 10%를 초과달성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1][2]
해당 성과를 본 김일성은 조선 최초의 장기 경제 계획인 인민경제5개년계획(人民經濟五個年計劃)을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공업화의 토대를 구축하고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에서 시행된 5개년 계획은 중공업 우선주의 경제 개발과 농업공동화를 중점적으로 하여 시행되었으나 해당 계획이 시행되던 도중인 1956년 발생한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김일성과 만주파가 그 권력을 잃고 숙청당하게 됨과 동시에 부수상이었던 박헌영과 남로당파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김일성의 유산과도 같았던 5개년 계획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시행이 중단된다.
이들이 권력을 잡은 직후 가장 먼저 건든 것은 김일성이 주도하던 5개년 계획이었다. 박헌영과 남로당파, 허가이와 소련파는 당시 제대로 된 농업 기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상식적으로 높게 책정된 농업 생산량 목표와 1954년 겨울에 내려진 개인 간 양곡 거래 금지령 등으로 인해 발발한 1955년 봄 식량위기[3]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해 더욱 체계화된 농업 계획의 필요성을 체감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기존 일제가 만주와 조선반도 북부 일대에 건설한 중공업 시설로도 당장의 경제 계획을 펼치는 것에 있어서의 중공업 산업 기반은 충분하다는 판단과 함께 기존 갑산파에서 전향한 소련 유학파 출신 김도만의 "기업소 지배인의 권한을 높이고 당 일꾼의 간섭을 낮추라"는 주장의 채택, 이와 함께 애당초 김일성이 집권 당시 주장한 '경제·국방 병진노선' 자체에 대한 반발 심리에 맞춰 새로운 경제 계획을 신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그 시작을 알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7개년 계획이다.
1차 (1956-1962)
제1차 7개년 계획은 국민소득 2.8배 증가, 공업 총생산 3.2배 증가, 양곡 생산 456만톤 증가를 목표 수치로 잡고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시행되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은 새롭게 정권을 잡은 박헌영은 김일성과는 무언가가 다를 것이라는 조선 인민들의 크나큰 기대감과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든든한 지원 하에 계획기간을 1년 앞당긴 1961년 목표 수치를 달성할 수 있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을 통해 조선의 국민소득은 약 3.1배 증가하였다. 공업 총생산액은 4.1% 증가하였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36.6%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하였다. 식량 생산량도 목표 수치를 한참 넘긴 464.6톤을 달성하였다.
이 시기에 강선제강소(現 천리마제강)에서 근무하던 진응원이라는 인물이 "나는 집단을 위하여, 집단은 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1959년 3월 8일 '천리마작업반운동'을 발기하였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은 강선제강소를 시작으로 산업 지대를 비롯하여 협동농장, 교육 시설 등 조선반도 각지에서 천리마작업반운동이 실시되며 본격적인 천리마운동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2차 (1963-1969)
3차 (1970-1976)
4차 (1977-1983)
5차 (1984-1990)
6차 (1991-1997)
7차 (1998-2004)
8차 (2005-2011)
9차 (2012-2018)
10차 (2019-2025)
영향력
기타
관련 문서
- 5개년 계획 - 7개년 계획의 원조격 되는 경제 발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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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곡물생산증가율은 목표치에서 약 3% 떨어진 7.1%를 달성하였다.
- ↑ 북한의 경제발전전략 70년의 회고와 향후 전망
- ↑ 이 당시 식량 배급량은 기존 정량이었던 600~900g보다 여실히 낮은 300g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하며 이는 후일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을 향한 비판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