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전투 (빌레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25번째 줄: 25번째 줄:
|-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병력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병력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52만 6천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72만 6천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81만 2천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81만 2천명
|-
|-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피해규모
! Width="20%"; colspan="1"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피해규모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39만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42만 6,721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45만명
| colspan="1" width=40% style="vertical-align:top;" | 총 사상자 약 45만명 1,051명
|-
|-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결과
! colspan="3" style="background:#536349; color:#fff;" | 결과

2024년 12월 11일 (수) 22:39 판

공지
| 빌레펠트 연재부
빌레펠트는 현재 노후문서재정비촉진사업을 진행중입니다. 현재 설정과 맞지 않는 문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2차 벨트크리그 |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연표 사건
193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철수 |
7월
스페인 내전 |
12월
미합중국 내전
1937년
5월
제7차 대타협 · 헝가리 반란 |
11월
사막전쟁
1938년
7월
하산 호 전투
1939년
9월
독일 침공(제2차 벨트크리그 발발) · 독일 본토 항공전 |
10월
엘자스-로트링겐 전역 · 브뤼셀 전투 |
11월
헬리펙스 회담
1940년
1월
아일랜드 전역 |
3월
켈트 해 해전 |
4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5월
암스테르담 철수 작전 |
6월
포항 상륙작전 |
7월
아헨 전투
1941년
2월
라인 강 대공세 · 프랑크푸르트 공방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독러전쟁, 겨울전쟁 발발) |
7월
함부르크 공방전 · 대한 해협 돌파 작전 |
9월
쾨니히스베르크 포위전개성 전투 |
10월
베를린 공방전 |
11월
한니발 작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1942년
4월
백마고지 전투 |
7월
1차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드레스덴 공방전 |
10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3년
1월
트리폴리 회담 |
2월
제3차 브레슬라우 전투 |
7월
포젠 전투 |
12월
낫질 작전(아르덴 대공세)
1944년
5월
제3차 부산 전투 |
6월
마르세유 상륙작전 · 바르바로사 작전 |
7월
사빈코프 암살 미수 사건 |
8월
키이우 봉기 |
9월
샤른호르스트 작전
1945년
1월
아우구스투스의 몰락 작전(드네프르-돈 공세) |
1월
슈비네뮌데 회담 |
2월
브리튼 전투(바다사자 작전 · 귀향 작전 · 리즈 폭격) |
4월
모스크바 공방전 · 러시아국의 항복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일본인민공화국의 항복 |
9월
제2차 벨트크리그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개성 전투
Battle of Kaesong
個性の戦い
제2차 벨트크리그41년 추계 공세의 일부
날짜
1941년 9월 22일~1942년 2월 16일
장소
대한제국, 개성 및 임진강 일대
교전국 대한국 일본인민공화국
지휘관 안중근[1]
김홍일[2]
이범석[3]
우메즈 요시지로[4]
이무라 조[5]
병력 72만 6천명 81만 2천명
피해규모 총 사상자 약 42만 6,721명 총 사상자 약 45만명 1,051명
결과
대한제국의 결정적 역전승
영향
대한제국이 임진강 이북을 사수함
한국전선 반격의 시발점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피난가는 피난민

개요

개성전투는 1941년 9월 22일 부터 1942년 2월 16일까지 개성을 비롯한 임진강과 예성강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던 전투이다. 김홍일의 지휘 아래의 대한제국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함락 시키려는 일본인민공화국군을 격퇴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일본군의 추가적인 진격을 저지, 이후 반격의 계기를 만들어낸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서론


개성 전투는 아시아 전선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군에 의해 약 300년만에 한성이 함락 당한 대한제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었고, 안중근의 계획대로 북한 지역에서 군을 재편하고, 반격의 구심점을 만들어내려면 안중근 라인의 사수. 즉, 임진강과 개성의 수비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한성의 함락은 크게 축하할 일이었다. 허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렀다. 아직 북쪽의 상당한 지역에서 한국군은 버티고 있었고, 밤낮 없이 가동되는 압록강 벨트의 무수한 군수공장들이 한국군을 빠르게 재무장 시키고 있었다. 특히, 한국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상 41년이 지나기 전에 한국을 끝장내기는 어려웠으나, 전쟁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일본군은 개성을 향한 총공세를 진행했다.

끝내 대한제국군이 예성강으로의 병력지원을 성공 시키고, 개성을 사수하여 일본군을 임진강 남쪽으로 철수 시키면서 개성 전투는 대한제국의 대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긴 전투에서 피해만 누적되고 오히려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대한제국을 향한 추가적인 공세를 진행할 수 없게 됐다. 개성 전투가 대한제국군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안중근의 계획대로 북한 지역에서 군을 재편할 수 있었고, 이는 훗날 반격의 구심점이 됐다.

배경

파죽지세의 일본군

함락된 한성

너무 넓고, 너무 적다

양측의 상황

대한제국군의 준비

일본군의 준비

41년 추계 공세의 시작

치열한 임진강 전역

아시아의 드레스덴

동장군의 도래

이범석의 역습

철퇴 작전

일본군의 철수

결과

영향

어록

  1. 원수부 도총관
  2. 개성 지구 전투 사령부 사령관
  3. 제1 야전군 사령관
  4.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5. 당시 제1방면군 사령관



ⓒ 2024. ERIA Co. All rights reserved.
ERIA 빌레펠트연재팀 정보
대표연재자 에러
이메일 errortalmo@gmail.com
디스코드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