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국군 (빌레펠트)



대한국 국군
大韓國國軍
Empire of Korea Armed Forces
국가 대한국
소속 대한국 국방부[군정권]

대한국 원수부[군령권]
통수권자[1] 경덕제 (대한제국 황제)[명목적]
유승민 (대한국 내각총리대신)[실질적]
지휘·감독권자[4] 예명로 (대한국 국방대신)[군정권]
해군 대장 김명수 (대한국 원수부 총관)[군령권]
상비군 72만여 명[5] (2022년 국방백서)
예비군 310만여 명[6] (2022년 국방백서)
병역제도 양성 징병제
육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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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대 전차 1,977대[7]
3세대 전차 1,051대[8]
2세대 전차 0대
1세대 전차 0대
중형전차 251대[9]
전차 총합 3273대
병력수송장갑차 7,021대[10]
보병전투차 2,005대[11]
소형전술차 10,000대[12]
견인포 3,500문 [13]
박격포 14,900문+[14]
자주포 3,150문[15]
야포 총합 5,600문[16]
다연장로켓 310문+[17]
지대지 유도무기 60기
해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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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함정 총합 321척
전투함정 총합 179척
상륙함정 총합 30척
소해정 총합 20척
지원함정 총합 40척
잠수함정 총합 52척
주력 수상함
10,000톤 이상-15,000톤 미만
방공구축함
7척[18]
8,000톤 이상-9,000톤 미만
방공구축함
14척[19]
5,000톤 이상-6,000톤 미만
구축함
12척[20]
3,000톤 이상-4,000톤 미만
구축함
15척[21]
6,000톤 이상-7,000톤 미만
아스널십
1척(+2척)[22]
4,000톤 이상-6,000톤 미만
방공호위함
8척(+6척)[23]
2,500톤 이상-4,000톤 미만
호위함
14척[24]
1,000톤 이상-1,500톤 미만
초계함
3척(-3척)[25]
500톤 이상-600톤 미만
미사일 고속함
24척[26]
200톤 이상-300톤 미만
미사일 고속정
22척(+18척)[27]
100톤 이상-200톤 미만
고속정
56척(-56척)[28]
항공모함, 상륙함, 군수지원함, 수송함, 지휘함
60,000톤 이상 ~ 75,000톤 미만
항공모함
1척[29]
30,000톤 이상-45,000톤 미만
경항공모함
2척[30]
15,000톤 이상-20,000톤 미만
강습상륙함
3척[31]
20,000톤 이상-25,000톤 미만
군수지원함
3척[32]
8,000톤 이상-10,000톤 미만
군수지원함
4척[33]
5,000톤 이상-10,000톤 미만
LPD, LSD
4척[34]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LST
4척[35]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기뢰부설함
2척[36]
100톤 이상-200톤 미만
공기부양정
24척[37]
잠수함
16,000톤 이상-18,000톤 미만
탄도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5척[38]
10,000톤 이상-12,000톤 미만
순항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
3척[39]
7,000톤 이상-8,000톤 미만
공격 원자력 잠수함
15척[40]
3,000톤 이상-5,0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11척[41]
1,700톤 이상-1,8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9척[42]
1,100톤 이상-1,200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9척[43]
공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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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대 전투기 225기(+100기)[44]
4.5세대 전투기 426기(+50기)[45]
4세대 전투기 351기[46]
3세대 전투기 98기[47]
조기경보통제기 (AEW&C) 18기[48]
해상초계기 26기[49]
공중급유기 20기[50]
고고도 무인 정찰기 6기[51]
폭격기 172기[52]
전투임무기 총합 1100기
공중기동기 총합 100기
감시통제기 총합 140기[53]
훈련기 총합 400기
공군기 총합 1912기
헬리콥터 1400기[54]
항공기 총합 3312기
예산
국방비 (GDP의 약 3.1%)

개요

2023년 국군의 날 134주년 열병식

대한국 국군(大韓國國軍, KOR Armed Forces)은 대한국의 정규군이다. 육군, 해군, 공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군 예하에 해병대를 두고 있다. 줄여서 '한국군(韓國軍)', 또는 '국군(國軍)'이라고도 한다.

조선군이 그 전신이며, 대한국 선포 이후 한청전쟁과 한러전쟁, 세계대전 등 굵직한 전쟁에 참가하며 성장했다. 세계에서 손 꼽히는 강력한 군사력과 핵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막강한 포병 및 기갑전력은 한국군의 자랑이다.

대한국 헌법 제74조 1항에 따라 대한국 황제는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

명칭

정식 명칭은 대한국 국군(大韓國國軍)이며, 줄여서 한국군 또는 국군이라고도 부르나,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이라는 명칭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널리 사용된다. 과거에는 황군이라는 명칭 또한 쓰였으나, 이는 동일본군의 명칭하고 겹칠 뿐만 아니라 1차 벨트크리그 당시 일본제국군의 명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황군을 말한다면 과거 일본제국군을 지칭하거나, 동일본군을 뜻한다.

영어로는 Empire of Korea Armed Forces, 줄여서 KOR Armed Forces라고 한다.

특징

강력한 대양함대와[55]공군전력 또한 미국, 독일과 견줄만한 수준이나 한국군의 가장 큰 강점은 강력한 전력의 육군 전력이다. 칼터크리그가 끝난 지금에도 한국군은 비대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나 육군의 막강한 기갑 및 포병전력은 타국과의 비교를 불허한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군의 화력 중심 교리는 특유의 인명 경시 분위기를 형성했는데, 만주전쟁에서 크게 데인 이후 완화된 지금에도 한국군 보병의 개인 장구류는 타국에 비해 부실한 편이다.

선진국 중에 특이하게 징병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국가기도 한데, 이는 한국군이 비대한 군 규모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칼터크리그 체제가 데탕트로 완화된 현대에도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대규모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군은 여전히 소규모의 정예군이 아닌 대규모의 비대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

근대화 이전

개화기

1867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끝내고 굳게 닫은 나라의 문을 열었다. 조선 사회 전체에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는 전근대적인 군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 교관이 파견되어 이를 주축으로 별기군이 창설 되었으며 별기군을 중심으로 조선군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허나 별기군의 창설은 별기군과 구식군인 간의 차별을 일으켰고, 이는 곧 군 내 척사파와 별기군에 대한 불만을 가진 구식군인들이 병자군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병자군란은 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병자군란으로 인해 국방력에 큰 타격을 입은 조선군의 근대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무인개혁으로 금위영과 시위영, 진위영이 설치되었으며, 무과시험이 폐지되었다. 동시에 훗날의 육군무관학교와 해군무관학교의 전신이 되는 삼군영학당과 통제영학당이 설립되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장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고, 수입과 군수공장의 건설을 통해 생산된 신식무기들은 조선군을 서서히 전근대 군대에서 근대 군대의 모습으로 탈바꿈 시키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점은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에 의해 개항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나, 이 시점에는 이미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패배한 이후였기 때문에 조선군의 근대화는 프랑스군을 참고하면서도 동시에 독일군의 제도 또한 참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훗날에 협상국 군대의 모습과 동맹국 군대의 모습이 동시에 연출되는 독특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1889년에는 대한국 선포와 함께 조선군에서 대한국 국군으로 재편되었으며, 한국군을 총지휘하는 원수부가 창설되어 당시 황제였던 고종을 대원수로 추대, 흥선대원군이 육해군 대원수에 올랐다.

평양 전투 당시 한국군

같은 해 7월에 청나라가 대한국의 선포에 반발하며 압록강을 넘어 한국을 침공하며 한청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한국은 일본과 동맹을 형성해 청에게 맞섰으며, 청군은 근대화 된 한국군에게 8월 평양 전투에서 박살났고, 다음 달 9월 북양함대가 한일 연합함대에 의해 황해 해전에서 격멸됐다. 그해 10월 1일에 양성환의 1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이는 훗날 한국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됐다. 요동에서까지 패배를 거듭하자 이듬해 1890년에 청은 개성조약을 체결하며 한국은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연화도를 할양 받았다.[56]또한 이때 청에게서 얻은 배상금은 한국군의 발전을 지속할 원동력이 되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면서 한국인이 살해 당하고 공사관이 포위되자, 한국은 9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만주와 베이징을 향해 진군했다. 의화단 운동 동안 한국이 9개국 연합군의 거점이 된 덕분에 이 영향으로 한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신축조약의 결과로 남만주까지 손에 얻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남만주에서 물러나게 되자 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됐다.

한국은 이해관계가 제법 맞았던 일본과 다시 한번 동맹을 맺고 1904년에 뤼순[57]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며 한러 전쟁을 일으켰다. 압록강 전투 이후 뤼순을 포위 하였으나, 이곳에서 무모한 공격으로 많은 피를 흘린 끝에야 간신히 함락 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이어진 봉천 전투에서 크게 승리, 1905년 5월에 러시아 발트 함대가 대마도 해전에서 한일 연합함대에게 패배하며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고, 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비사시를 조차로 얻어낼 수 있었다.

제1차 벨트크리그

수원 전투 기록화

대한국이 선포 될 때까지 한국은 확실히 동맹국 보단 협상국에 가까운 국가였다. 1911년에 요동 사변을 일으켜 남만주[58]를 얻어냈고, 이후 남만주 대토벌 작전 등 한국군 상당수가 남만주 안정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동맹을 체결하며 적극적으로 친 협상국 행보를 보이던 일본만큼은 아니었으나, 당시까지의 한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벤치마킹하여 근대화된 국가였고, 내각 인사들의 상당수도 친미, 친영, 친프 성향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동아시아의 양강으로서 한일은 서서히 서로 라이벌이 되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친 협상국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두차례의 전쟁에서 한일은 동맹을 체결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당시까지는 한국의 국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은 한국 보다 한발 앞서 근대화한 국가였고 국가의 규모, 인구 부터 두배가 차이나던 국가였다.

하지만 1898년 흥선대원군이 사망하고, 고종이 실권을 잡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한러 전쟁이 끝나고, 남만주 대토벌 작전이 성공으로 마무리 될 쯔음 부터 한국은 친독, 친 동맹국 국가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한국의 행보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까지는" 동맹국 국가가 아니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제1차 벨트크리그가 터지면서 일본이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했음에도 한국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립은 1915년 일본의 부산 기습으로 깨졌다. 친독적 행보로 선회하고 있던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던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기습했고, 아무런 대비 없이 허를 찔린[59]한국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성공적인 기습으로 한국전선을 열은 일본은 순식간에 삼남을 점령, 파죽지새로 수원까지 다다르자 조정은 한성을 포기했고, 평양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내각총리던 이완용은 고종을 데리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훗날의 성조가 되는 의친왕의 쿠데타로 저지되었다.[60]

노획된 일본군의 마크 전차

일본군의 진격도 거기까지였다. 일본군은 수원 전투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제 1군에 박살났고,[61]동장군이 도래하면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이내 한국군의 공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위험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한 일본군은 대규모로 후퇴하여 경상도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고, 1916년 부터 종전까지 한국전선은 서부전선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참호전과 고지전의 양상으로 흘라갔다.

1915년에는 최초의 비행부대가 창설됐고, 그해 말에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창설됐다. 1917년 다부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한국전선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했고, 1918년엔 마산 전투에서 한국군 전차가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맞섰다.

1918년,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과 미국이 독일과의 평화협상에 나서자 한국전선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장사리 상륙작전제2차 포항 전투를 진행하며 10월 공세를 전개하였으나,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에 대패, 11월에 협상장에 나서며 도쿄 조약[62]을 체결했다. 이로써 3년간 진행된 한국전선은 제1차 벨트크리그의 끝을 알리며 막을 내렸다.

전간기

블라디보스토크[63]의 한국군

제1차 벨트크리그가 끝나자마자 한국은 동맹 독일의 요청에 따라 백군을 지원하고 적군을 격멸하기 위해 적백 내전에 개입했다. 이러한 북방 출병은 경상도의 일본군이 완전히 철군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무리한 결정이었는데, 이러한 결정의 맥락에는 한국의 야욕이 숨어있었다. 한국군 또한 러시아군과 만주 일대에서 몇차례의 교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양측 모두 만주와 연해주 일대 보다 훨씬 중요한 주전선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한국은 영토 할양은 물론이거니와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고, 마침 독일이 적백 내전에 군사개입을 요청하자 공산주의 저지라는 목적 아래, 전후 시베리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시베리아의 적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나 한국은 북방 출병에서 별다른 큰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적군의 격멸과 백군 위주의 신 정부 수립이라는 표면적인 목표는 달성했으나, 대중의 전쟁 피로도와 막대한 군비 지출, 국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은 "시베리아에서의 한국의 영향력 확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연해주 확보라는 꿈은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아무튼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한국은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승리했다. 이웃국가인 러시아, 중국, 일본은 모두 내란상태이거나 아직도 그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쿄 조약으로 일본에게서 대마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극동의 유일한 열강국으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누리게 되었으나, 한국은 그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1927년, 국민당이 제1차 북벌을 진행하자 한국은 독일과 함께 국민혁명군을 저지, 이 과정에서 푸이를 데려와 청나라를 복고 시켰다. 동시에 이러한 중국의 혼란을 놓치지 않고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암살하고, 만주 출병을 진행하여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 만주민국을 수립했다.

이렇게 꿈만 같던 20년대가 끝나고, 30년대가 들어서자 서서히 먹구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시아 곳곳에서 생디칼리즘이 준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한국군의 역량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바로 옆나라 일본은 일본 내전 이후 생디칼리즘 정권인 일본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었는데, 일공은 공격적인 군증 정책을 이어가며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 시켜가고 있었다. 한국은 충분히 강력한 국가가 되어있었지만, 절대적인 국가의 체급은 여전히 일본이 한 계단 위였다. 거기다가 34년에는 러시아의 사빈코프가 나치당을 필두로 러시아를 장악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36년 부터는 독일발 검은 월요일이 전세계를 덮치기 시작하면서 20년대 한국의 황금기는 끝을 고했다.

검은 월요일은 한국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경제가 검은 월요일으로 무너져 내림에 따라, 한국군의 모든 방산 사업이 일시적으로 중단 되었고, 참혹했던 제1차 벨트크리그의 기억은 위대한 승전사로 변질되어 한국군 상당수가 그 향수에 빠져 보수적인 군대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제2차 벨트크리그

초반

포항의 2사단 병사들

1931년, 일본 인민군이 복건의 국민당 좌파를 도와 괴뢰정부인 복건 정부를 수립하는 복건 출병이 일어나자, 한국군은 일본과의 두번째 전쟁이 머지 않아 다가올 것을 느꼈다. 이에 따라 몇가지 군사개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36년에 터져버린 검은 월요일으로 모두 중단 되고야 말았다. 이듬해 7월에 일본이 난창 사건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야욕을 어김 없이 드러내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한국군은 몇가지의 경제 개혁이 완료되어 검은 월요일의 큰 불은 대략적으로 잡힌 38년 부터 중단된 군사 개혁들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은 한국군의 편이 아니었다.

1939년에 프랑스 코뮌이 엘자스-로트링겐의 대한 최후 통첩을 독일에게 발송하고, 독일이 거부하자, 제3 인터내셔널의 라이히스팍트의 대한 대대적인 침공이 일어나면서 제2차 벨트크리그가 발발했다. 라이히스팍트의 일원이자 독일의 동맹이던 한국은 9월 5일에 인터내셔널에 선전포고, 제3 인터내셔널의 일원이던 일본인민공화국과 자동으로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제2차 한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막상 전쟁이 일어났지만, 1년 동안 별다른 교전 없이 가짜 전쟁만 이어졌다. 그나마 한국군이 청군을 도와 중국전선에서 몇번의 교전을 치루거나, 청룡함대가 몇번의 해전을 치룬 것이 전부였다. 이는 한일 양쪽이 모두 전쟁 준비가 끝나지 않았음이 원인이었다. 한국군은 물론이고, 일본군 또한 생각보다 이른 개전으로 인해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고, 더군다나 한국을 공략할 마땅한 루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부산은 한번 공략한 이후였고, 그렇다고 다른 지역을 공격하기엔 병참로가 너무 길어졌다. 더욱이 양측 모두 함대 결전 사상으로 인해 주력 함대 간의 적극적인 교전은 없었지만,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전개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신성모 원수부 총관이 "국군은 황제폐하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오사카에서 먹고 저녁은 도쿄에서 먹을 수 있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은 포항 상륙작전으로 인해 철저히 박살났다. 일본의 도박적인 작전이었던 포항 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종결됐고, 포항에 이어서 울산 포위전에서까지 패배하자, 주력군이 몰려있던 경상남도 전역이 포위될 위험에 놓이면서 한국군에게 재앙이 시작됐다. 절망적인 후퇴가 이어졌고, 양세봉의 지휘 하에 목포 철수 작전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구원할 수는 있었지만, 상당수의 장비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대한해협을 상실하면서 이화함대는 한국해와 서해로 분리되어 주도적인 작전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고, 청룡함대는 본토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제 개혁이 진행됐다. 육군항공대가 재편되며 공군이 창설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군제개혁의 의의는 충분 했지만, 전선을 수습하기엔 절대적인 병력의 수에서 열세였다. 포항에서의 패배 이후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재앙을 수습하고 한국군을 재건하기엔 족히 1년은 필요했다.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민과 전선으로 향하는 한국군 병사들

그리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군은 지연전을 이어갔다. 40년에 이어서 41년, 추풍령과 대전에서 패배가 이어졌지만 이내 일본군의 진격에도 장애물이 나타났다. 김홍일이 지휘하는 한성지구방어사령부는 한강 유역에서 방어선을 구성해 격렬한 저항을 이어갔고, 결과적으로 한성을 잃었으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안기며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한성에서의 전투로 시간을 벌 수는 있었으나, 한성의 함락 그 자체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노동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평화협정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그해 6월에 러시아가 바그라티온 작전을 전개하면서 라이히스팍트를 침공하자, 만주전선이 형성 되면서 가뜩이나 불리했던 전황에 양면전선이 추가 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패배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익문사 독리이던 김구가 정보대상무영을 무력화 시키고, 이화함대의 수병들을 이끄는 손원일과 포항에서의 패배 이후 좌천되어 있던 권준을 포섭하여 남포와 임시수도였던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7.11 군사정변) 제국익문사 요원들을 동원하여 중추원을 점령. 노동당 의원들을 납치, 또는 내란 혐의로 체포하여 암살하거나 황제에 대한 충성혈서를 강요했다. 이러한 김구의 군사 정변은 성조의 재가를 얻으면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새 전시내각이 수립되었고, 김구는 퇴역한 안중근을 설득해 그를 새 원수부 총관에 앉혔다.

중반

106 고지의 한국군 병사

1941년 말은 한국전선의 변곡점이었다. 일본은 삼남을 물론이거니와 한성을 점령하며 승리를 앞두고 있었고, 한국군의 전면적인 붕괴가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격은 그리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었다. 포항 상륙 이후 근 두달을 그 인근에 붙잡혀 있어야 했었고, 포항 전선을 무너뜨리고 목포까지 한국군을 추격하는데에만 그해를 다 써야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다가온 덕분에 추풍령에서 봄이 올 때까지 한참을 끌렸다. 간신히 한성을 점령하고 나서는 한국의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것은 곧 한국전선에서의 두번째 겨울이 머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새 원수부 총관으로 임명된 안중근은 일명 안중근 라인을 건설했다. 안중근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40년과 41년 초에서 이어진 군사적인 재앙을 수습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임진강-철원-고성을 이어 건설된 안중근 라인은 사실상 한국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한국군에게 있어서 새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었지만, 41년 말엽에 접어들면서 한국군 자체는 빠르게 재건되고 있었다. 압록강 벨트의 군수공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 많은 군수물자들은 한국군을 빠르게 재무장 시키고 있었고, 총동원령이 발효됨에 따라 한국군은 여성과[64] 청소년까지 징병하면서 마지막 최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선의 후방에서는 의병들이 궐기하며 적후 제2전선을 개막 했다.[65]

압록강 방공전 당시 일본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기 위해 이륙하는 한국 공군[66]

최종 승리와 전쟁의 계속이라는 갈림길에서 일본은 한국을 끝내기 위한 공세를 이어갔다. 왕징웨이 공작에 이은 박헌영 공작으로 김구의 노동당원 탄압을 피해 도망친 박헌영을 포섭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고, 압록강 벨트를 파괴하기 위해 압록강 방공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41년 추계 공세를 시작했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
원수부 명령 227호

41년 추계 공세는 한국 전선의 모든 곳에서 진행된 공세였지만 그 제1 목표가 임진강의 돌파였으니 임진강에서 가장 큰 전투가 일어났다. 한일 양측의 운명을 건 전투였더니 만큼 양측 대부분의 주요장군들과 네임드 사단이 집결한, 그야말로 제2차 한일전 사상 가장 큰 전투라 할 수 있었다.[67] 안중근 라인의 건설 시간 자체가 부족했으니 임진강 방어선의 요새와 참호선은 그리 체계적이거나 탄탄하지 못했으나, 한국군은 악착 같이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일본군에겐 한국전선에서 가장 악몽 같은 시간이었겠으나, 진짜 악몽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간신히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한 일본군을 기다리던 것은 이전의 한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벽을 느끼게 했었던 김홍일과 그가 지휘하는 개성지구전투사령부였다. 개성부는 한국의 대도시 중 한 곳이었고, 도시 중심부는 분지로 둘러싸여있었다. 거기다가 개성의 북쪽에 위치한 송악산은 개성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국이 근대화 할 때 부터 주요 공업지대로 성장한 개성공단의 구불구불한 내부 구조는 그야말로 하나의 요새와 다름 없었다.

아시아의 드레스덴[68]이라고 불렸던 개성 전투는 그렇게 시작했다. 일본은 개성으로 전해지는 보급을 방해하기 위해 예성강에 공습을 진행했지만 한국 공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수 많은 악조건과 재건된 한국군을 마주한 일본군은 개성에서 큰 피해를 입고 몇달을 질질 끌어야만 했고 한국전선의 두번째 겨울이 다가오면서 승패는 결정났다. 한국의 끔찍한 겨울을 이미 한번 경험한 일본군이었지만 41년의 겨울은 달랐다. 유례가 없는 강추위였고, 개성은 삼남의 겨울 보다 그 혹독함이 더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몸을 녹일 시간을 주지 않도록 한국군은 쉴틈 없이 계속해서 괴롭혀왔다. 이미 패배를 인식한 일본군이었지만 그럼에도 몇달을 개성에서 버티다 한국군의 포위 위협이 다가오자 끝내 2월달에 철수했다.

임진강을 건너는 제1기갑 사단 소속 전차대[69]

42년 초가 되면서 한국은 확실하게 전쟁의 주도권을 손에 얻었다. 일본은 한국전선 이전부터 이미 중일 전쟁에 발이 묶여 있었고, 개성 전투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던 41년 12월에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며 남방전선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남방전선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태평양은 미국이 아직 내전의 잿더미에서 막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일단 일본은 현지의 생디칼리즘 협력자들을 이용해[70] 남방 전선에서 기록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태평양에서 미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가장 중요한 회전에서 패배한 조선 파견군은 피해를 회복할만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 문제였다. 더욱이 개성 전투가 끝난지 한달 후인 3월에 한국은 합이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만주 전선이 안정되면서 한국은 양쪽에서 덮쳐오던 큰불을 잠재울 수 있었고, 이는 곧 한국이 일본을 향한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성에서의 큰 싸움이 끝난 후에 안중근 라인에서 몇번의 고지전이 이어졌다. 한국에게 있어선 역습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일본에게 있어선 현재의 전선을 굳히기 위한 공세적 방어의 일환이었다. 조선 파견군에게 개성 전투는 재앙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박헌영 정권 소속의 괴뢰군까지 동원한 공세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수습할 수 없는 대패를 입은 일본군은 이윽고 전 전선에 걸친 한국군의 총공세를 마주했다.(독수리 작전)

종전

한성 수복

1942년 말에 한국은 임진강 이남에 교두보를 형성했고, 이미 전과를 확대하여 파주와 양주를 수복하고 의정부 외곽을 공격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일본의 점령 하에 있던 한성에는 한국 공군과 일본 공군의 치열한 제공전이 진행되고 있었고, 남진하는 한국군과 저지하려는 일본군의 교전 소리가 들리는 수준이었다. 43년이 들어서자마자 의정부를 수복한 한국군은 김학규 참장의 제1사단이 미아리에 진입하며 한성 수복전을 시작했다. 이범석 대장이 이끄는 제1야전군은 순식간에 경기도 북부를 수복하여 한성을 하나의 돌출부로 만들었고, 커다한 한강을 뒤로 두고 삼면으로 포위된 일본군은 몇 안되는 한강의 교량들을 통해 끔직한 후퇴를 진행해야했다.[71]

한성을 수복한 한국군은 병력을 재편성하고(후퇴 과정에서 일본군이 철교들을 폭파한 덕분에) 도하 준비를 위해 6월까지 주목할만한 공세를 진행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43년에 들어서면 모든 전선에서 한계에 봉착한 시점이었다. 더욱이 본토의 이화함대와 오스트랄시야까지 후퇴한 청룡함대를 무시하고서 태평양 전선을 열어젖힌 덕분에 연합함대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와 청룡함대, 그리고 이화함대의 견제와 공세를 양쪽에서 받아 상당히 곤란한 위치에 서있게 되었다. 43년 5월엔 한국의 티거 탱크라고 불리는 19식 3호 중전차 흑표 가형과 이어서 나형이 출현하면서 일본군에게 "흑표 쇼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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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국가원수의 권한으로서 군에 관한 모든 것을 통솔할 수 있다.
  2. 대한국 황제는 대한국의 상징적 국가원수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지닌다.
  3. 대한국의 행정수반으로 실질적으로 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한다.
  4. 군령권과 군정권을 지휘한다.
  5. 육군 48만 + 해군(해병대 27, 800명 포함) 12만 + 공군 12만
  6. 사관후보생, 전시근로소집, 전환/대체 복무 인원 등 포함.
  7. 26식 3호 주력전차 E2형 1027대, 26식 3호 주력전차 A3형 484대, 17식 4호 주력전차 흑표 466대.
  8. 26식 3호 주력전차.
  9. 11식 보병전투차량 120mm.
  10. 15식 장갑차, 22식 장갑차 806, 42식 상륙돌격장갑차.
  11. 11식 보병전투차량, 22식 장갑차 808, 22식 장갑차 808 120mm.
  12. 21식 소형전술차량 현마.
  13. 23식 155mm 견인포.
  14. 28식 60mm 박격포, 1식 81mm 박격포, 24식 120mm 박격포.
  15. 4식 자주곡사포 A1, 29식 자주곡사포 A1, 22식 차륜형 자주곡사포 풍익.
  16. 해병대 포함
  17. 해병 포함. GMARS, 1식 다연장로켓 구룡, 18식 다연장로켓 천무.
  18. 세종대왕급 3척, 정조대제급 3척, 성조대제급 1척.
  19. 시경신순성급 10척, 문약민영환급 4.
  20. 충무공이순신급.
  21. 광개토대왕급
  22. 태조대제급 합동화력함, 2척 추가 건조 예정.
  23. 충남급 8척, FFX Batch-IV 계획.
  24. 인천급 6척, 대구급 8척.
  25. 포항급, 2030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
  26. 윤영하급
  27. PKX-B, 초기형과 후기형 각각 16 + 18척 예정.
  28. 참수리급, 2030년까지 전량 퇴역 예정.
  29. 백두급 정규항공모함.
  30. 한라급 경항공모함 한라, 태백.
  31. 독도급 대형수송함 독도, 마라도, 이어도.
  32. 소양급 군수지원함 소양, 백록, 시화.
  33. 천지급 군수지원함 천지, 대청, 화천, 의암.
  34. 천왕봉급 상륙함 천왕봉, 천자봉, 일출봉, 노적봉.
  35. 고준봉급 상륙함 고준봉, 비로봉, 향로봉, 성인봉.
  36. 남포급 기뢰부설함 남포, 원산.
  37. 솔개 631급 고속상륙정
  38. 백야김좌진급 잠수함.
  39. 충장공양성환급 잠수함.
  40. 여옥이범윤급 잠수함.
  41.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42. 손원일급 잠수함.
  43. 장보고급 잠수함.
  44. Me 357 빈샤트 120기, 21식 전투기 KF-21 보라매 105기 및 추가 100기 예정
  45. 23식 전투기 KF-23U 돌풍 추가 50기 예정
  46. Fw 224 슈반 42기,23식 전투기 KF-23 돌풍 120기, 15식 다목적 전투기 FA-15 참매 189기.
  47. 8식 전투기 KF-8 제공호.
  48. 1식 조기경보통제기 KA-1
  49. 36식 해상초계기 KA-36, 17식 해상초계기 KA-17.
  50. 20식 공중급유기 KC-20.
  51. He 105 4기, 25식 고고도 무인 정찰기 KQ-25 2기.
  52. 30식 폭격기 KAI-30 소월.
  53. 해군 포함
  54. 육군 해군 포함
  55. 대표적으로 이화함대와 청룡함대
  56. 이때 일본은 대만을 할양 받았다.
  57. 현재 비사시의 일부
  58. 현재의 요동도와 압록도
  59. 제국익문사와 정보대에서 몇번의 경고가 있었으나, 모두 무시됐다.
  60. 이완용은 목숨을 건져 일본의 점령지인 부산으로 도망칠 수 있었으나, 1918년 이재명 의사에 의해 피살된다.
  61. 훗날 이 전투에서 활약한 홍범도, 안중근, 김좌진은 삼(三) 장군이라고 불렸다.
  62. 한국은 대마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더불어 이 조약에서 이오지마가 독일에게, 그리고 류큐는 독립했다.
  63. 현 해삼위부
  64. 이미 한국군은 제1차 벨트크리그에서 몇몇의 여군들을 동원한 바가 있었다.
  65. 아이러니하게도 적후 제2전선은 일본이 한국의 봉건주의적인 정권의 타도를 위해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궐기할 것임을 주장하며 사용했던 표현이었다.
  66. 사진의 주인공은 한국 공군의 전설 중 한명인 빨간마후라의 김영환, 사진 속 기체는 15식 전투기 KF-15 벌매다.
  67. 한국은 이 전투의 수행을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만주군의 병력까지 빼왔으니 말 다했다.
  68. 실제로는 개성 전투가 드레스덴 전투 보다 먼저 시작했다.
  69. 사진 속 전차는 14식 1호 중형전차 표범
  70. 바라트 코뮌의 도움도 있었다.
  71. 더욱이 이전에 있었던 41년의 한성 전투로 인해 한강의 교량들은 매우 불안정 하거나 아예 파괴되어 있었기에 후퇴 과정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