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 연방/역사

라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관련 문서
Union der Sozialistischen Räterepubliken

개요

라트 연방의 역사를 다룬 문서.

1910년대: 구 제국의 모순과 혁명

1870년 보불전쟁을 통해 성립된 독일제국은 외양상으로 유럽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처럼 보였다. 군사력은 세계 2위였고, 육군력은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것만큼 강대했다. 또한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재 아래 국가자본주의가 도입되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동시에 여러 사회적 모순을 야기했다. 우선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대로, 자본가 계급은 산업화 하에서 급속하게 부를 축적했지만, 절대다수 농민들은 농업의 산업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되었다. 도시 노동자 계급은 빈곤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했다.

결국 독일제국의 성립은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 대립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것이었다. 독일 제국은 사회보험 제도 등 일부 사회적 개혁을 도입했으나, 이는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시기의 사회 보험 제도는 노동 계급의 불만을 다소 완화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변혁이 아닌 자본주의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러한 모순을 내재한 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었으므로 독일제국은 여러차례의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 시기에 들어 비스마르크 시대의 현실주의(realpolitik)를 포기하고 국제정치(Weltpolitik)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국제정치는 실질적으로 독일의 제국주의, 즉 자본의 수출이었다. 독일 제국 말기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군국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독일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의 식민지 확장을 추구했고, 이를 위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는 독일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더욱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적, 외교적 대립을 더 심화시켰다.

게다가, 독일은 외양상으로 의회제를 선택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구 봉건시대의 귀족과 일부 재벌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총리를 임명, 해임할 수 있었고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 시기 사실상 전제군주제 처럼 작동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결여된 채,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억압되었음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 시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정치적 자유와 노동운동을 억압했으며, 이는 노동 계급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모든 체제 모순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성급히 전쟁에 참여한 채 사실상 패전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 등 군국주의적 정책을 수립하였고,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사회민주당(SPD)의 총파업을 무력진압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에서 독일은 승리할 수 없었다. 전쟁은 기약 없는 참호전으로 귀결되었고, 자원이 바닥난 독일제국은 "순무의 계절"이라 부르는 혹독한 기근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다못한 독일 해군 수병들이 1918년 11월 봉기한 킬 군항의 반란으로 연쇄혁명이 일어나 독일 전역에서 전쟁 반대와 황제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주하려다가 혁명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구금되었고, 독일제국은 멸망하여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를 1918년 독일 혁명이라 부른다.

뒤이은 1919년 1월, 부르주아 혁명에 이른 사회주의 혁명의 즉각이행을 주장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에 의해 1919년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주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였다. 공화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이들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의 이행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혁명은 사실상 무혈로 끝났다. 그러나 베를린 밖에서는 귀족과 재벌이 이에 반대하는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참전용사로 구성된 극우 근황주의 집단은 내전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톨릭 중앙당, 근황주의자, 일부 사민당 보수파가 연합한 반동배인 흑군과, 변혁을 추동하고자 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가 구성한 적군이 대립한 정국을 흑적내전이라고 부른다.

1920년대: 사회주의 대조국의 태동기

흑적내전 초기에는 참전용사가 주축을 이룬 흑군이 유리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흑군에 지지를 보태지 않았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 우파, 자유주의자, 근황주의자, 가톨릭신도 등 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흑군은 적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합력이 떨어졌다. 결국 흑군은 패주를 거듭하다가 1922년 말 사실상 붕괴되었고, 소수 근황주의자들은 영국으로 도피해 독일제국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한편 빌헬름 2세는 러시아로 탈출하려 하다 실패하자 적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로서 3년간의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났고, 적군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 세력과 연대하고자 했다. 우선 오스트리아에서도 흑적내전의 연장선상으로서 독일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태였다. 유럽에서 여러 연쇄혁명이 일어났으나, 성공한 곳은 쿤 벨러가 이끈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과 핀란드 내전에서 승전한 핀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뿐이었다. 독일은 아쉬울대로 이들과 연합하여 국제 사회주의 연방체를 수립하고자 했고, 192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열띤 논쟁과 토론 끝에 헌법이 완성되었다. 이로서 1922년 12월 30일,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헝가리 4개국의 혁명정부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토대가 될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이른바 라트 연방을 수립하였다.

라트 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결착지을 책무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 뒤늦게나마 라트 연방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협상국과 제대로 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라트 연방은 독일 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온 국가이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유화론과 프랑스의 강경론 중에서는 미국의 유화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 라인 지역의 비무장과 엘자스-로트링겐 지역의 프랑스 할양, 폴란드 접경 지대의 폴란드 편입, 그리고 320억 마르크 가량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3년간의 내전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 부담으로 인해 신생 라트 연방의 경제는 말이 아닌 수준이었다.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막대한 기근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러시아 혁명 실패 후 망명한 경제학자 니콜라이 부하린을 책임자로 하여 신경제정책을 수립하였다. 이 정책은 라트 연방에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시킴으로서 경기를 회복하고 국제적 고립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득보다 실이 더 큼에 따라 이 정책은 폐기되었다. 아쉬운대로 에베르트 정권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르크를 폐지하고 탈러화를 도입했는데, 이것으로 인플레이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를 탈러화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슈트라서의 독재

1940년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다

1950년대: 전후 호황기를 맞이하다

1960년대: 과도기와 문화대혁명

1970년대: 프람의 집권, 데탕트의 시대

1980년대: 호네커가 냉전을 사회주의의 승리로 이끌다

1990년대: 개혁과 개방의 탈냉전기

2000년대 이후의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