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 연방/종교

라트 연방
관련 문서

개요

라트 연방의 종교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역사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종교는 노예제와 봉건제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주술로서 생산양식의 발달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는 비과학적 믿음이다. 이에 따라 초기 라트 연방국가무신론을 표방하여 이전의 독일제국과 달리 종교를 장려하지 않았으며, 종교에 앞서 과학을 강조하였다.

독일제국 시기 국교는 기독교로, 인구의 90% 이상이 기독교였다. 따라서 라트 연방의 초기 관료들은 종교를 강하게 억압하기보다는 무신론을 유도해야한다고 보았다. 교회에 대한 예배는 평소와 같이 유지되었으며, 일부 협조적인 성직자들은 공산당 체제 하에서도 별 문제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적내전과 이후의 공업화 과정에서 다수의 종교인들이 라트 연방 정부에 비협조적이거나 반동적 흐름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성직자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서구권에서는 이를 두고 종교의 탄압이라고 과대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트 연방은 헌법 차원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였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노동력의 집약적 활용을 강화하고 국민적인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 종교의 영향력을 사회에서 점차 배제시키고자 했다. 모든 학교 과정에서 종교 윤리가 배제되었고, 많은 교회소가 폐쇄되었다. 유대교 등 다른 종교도 억압되었다. 1949년 슈트라서가 사망한 후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집권했지만, 여전히 반신론적인 국가 정책이 유지되었다. 단 괴벨스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유대교에도 유화적이었다.

1968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종교를 대하는 라트 연방의 태도는 다시 한번 변하게 되었다. 문화혁명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좌파 성향 대학생들은 공산당의 강압적인 통치에도 반대했지만 기독교와 같은 구습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당에 의한 교회 탄압보다 대중에 의한 교회 탄압이 더 심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교회가 공산당의 통치에 점차 협조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1978년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1980년에는 보수파인 에리히 호네커가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와 "역사적 화해"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신론적 무신론이라는 전반적 교육 과정은 변하지 않았다.

1990년대 탈냉전에 접어들자, 당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니콜라스 네메트네메트 개혁 하에 종교의 자유는 보다 폭넓게 인정되었고, 당원이 무신론자여야한다는 조항 역시 고위당직자가 무신론자여야한다는 조항으로 대체되었다. 2006년, 두번째로 라트 연방 출신인 요제프 라칭거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2024년까지 재위했다.

분포

2024년 인구조사 결과, 라트 연방 내 최대 종교는 기독교로, 인구의 22.59%가 믿고 있다. 제2 종교는 회교로 3.71%를 차지하며, 민족종교인 유대교는 제3종교로 2.03%를 차지한다. 그 외 기타 종교는 0.66% 정도이다. 무종교인은 71.00%로 2024년 조사에서 처음으로 70%를 넘어섰다. 다만, 실제로는 기독교인 수가 약 35%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기독교

회교

유대교

세계 최대의 유대교 국가로, 전세계 유대교 신자의 약 절반에 속하는 740만명의 유대교 신자가 살고 있다. 라트 연방 전체에 퍼져 살고 있는 1,600만명의 유대인 중 유대교 신자는 그중 약 46.6%를 차지한다. 유대인은 전체 민족 집단 중 가장 종교 신자 비율이 높은 집단에 속한다. 단,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종교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비해 세속적인 색체가 강하며, 종교만 유대인이고 사실상 무신론자처럼 활동하는 유대인이 많다.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라트 연방이 상대적으로 유대인에 관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고, 1990년대 미국의 혼란으로 인해 미국의 유대인들이 다수 팔레스타인이나 라트 연방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라트 연방 내에서 유대교는 유일하게 감소 추세를 보이지 않는 종교의 지위에 속하고 있다.

기타 종교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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