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칼럼 | 지미 카터의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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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에 큰 관심이 없다면 지미 카터를 오래 사는 사람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가 생각한다. 사실 미국사에서 카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기 때문에 미국사를 제대로 배워도 카터의 업적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즉 레이건(레이거노믹스)이나 닉슨(미중정상회담), 존슨(위대한 사회) 등 카터 전후의 대통령에 비해 카터가 무엇을 했는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인권외교를 하다가 석유 파동에 부적절하게 대응해서 레이건에게 정권을 넘겨준 노벨상 수상자가 카터에 대한 인식의 거의 전부이다. 그런데 카터를 이렇게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카터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카터가 민주당원이었음에도 공화당보다도 더욱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한 남부의 보수민주당원이었기 때문이다.

 

남부 보수주의 민주당의 기원

초기 미국 민주당은 제퍼슨과 잭슨의 이상을 따르는 진보적 대중주의 정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발발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민주당은 스티븐 A. 더글러스(Stephen A. Douglas)를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에 반대하고 미국에 잔류하는 "전쟁민주당"(War democrat)과 존 C. 브레킨리지(John C. Breckinridge)를 중심으로 하여 노예제 찬성과 남부의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남부 민주당"(fire-eaters)으로 분열되었다. 남북전쟁에서 이긴건 미국이었지만 민주당은 이기지 않았다. "전쟁민주당"은 전후 앤드루 존슨을 파벌 영수로 옹립하지만, 전후 처리의 무능을 드러내며 남부와 북부 모두의 지지를 잃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북부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남부 주민들은 강력한 반 북부, 반 진보, 반 인종평등을 기치로 한 "남부 자존심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이를 리디머(Redeemer) 운동이라 한다.

 

리디머 운동의 지지자들은 링컨과 공화당이 내세운 가치에 반발했다. 그들은 중앙 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되며(=정부는 경제와 인종평등 문제에 개입하면 안된다), 세금을 인하하고, 공화당의 부정부패를 청산하며, 흑인들의 투표권을 점진적으로 박탈하는 한편 공교육을 축소해 남부를 영구히 백인의 땅으로 만드는 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 속에서 남부의 민주당은 다른 지역의 민주당과 달리 상당히 보수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고립주의를 지지하는 파벌로 성장했다. 20세기 초반 민주당의 진보화 추세 경향속에서도 해리 F. 버드(Harry F. Byrd), 리처드 러셀(Richard Russel) 등을 비롯한 많은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반대하고 남부의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정서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정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20세기 이후, 민주당이 더욱 적극적으로 진보주의 의제를 선택하고, 특히 휴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 부통령이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 같은 정치가들이 흑인의 인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남부 민주당원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버지니아의 해리 버드 부자(Harry F. Byrd & Harry Byrd jr.)조지 월리스(George C. Wallace), 존 스테니스(John C. Stennis), 제임스 이스트랜드(James Eastland), 윌리엄 풀브라이트(James William Fulbright)와 같은 많은 남부의 정치가들은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인종평등 정책에 반발했고, KKK단을 소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일부는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옳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모든 남부의 민주당원들이 이런 극단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남부의 민주당 정치가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정서가 인종주의 철폐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쓰였고, 그렇기 때문에 넓은 가량으로 흑인들을 포용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복음의 정신이라는 논리에서였다. 이를 "신남부"(New South) 보수주의라고 하는데, 이들은 환경과 교육, 인종 문제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관점을 새롭게 해석해 다소 진보적인 색체를 띄었다. 그 외의 문제에서는 다른 인종주의적 남부 민주당원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기독교 우파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의 대표 주자가 바로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였다.

 

1976년 대선: 카터의 게임 체인지

그렇다면 이런 기독교 보수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미 카터는 어떻게 1976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지미 카터는 1976년 대선에서 프론트러너가 아니었다. 1975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지미 카터는 겨우 전국적으로 2%에 불과한 지지율을 기록했고, 워싱턴주의 헨리 잭슨(Henry Scoop Jackson)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Jerry Brown), 하원의원 모 유돌(Mo Udall) 등이 유력 주자로 꼽혔다. 그러나 당시 가장 유력하고 인기도 좋았던 후보들, 예를 들어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 동생 테드 케네디(Ted Kennedy) 상원의원이나, 휴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 등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1976년 미국 대선은 민주당 내에서 대권 주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여론조사에서 두각을 보인 각 후보자들은 나름의 결점이 있었다. 헨리 잭슨은 소련에 맞서 진보주의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해야한다는 정신병자 네오콘이었고, 제리 브라운은 진지하지 못한 공약으로 비판받았고, 모 유돌은 대통령이 되기에는 너무 웃긴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1970년대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어느때보다도 심각했던 때였다. 당시 민주당은 테드 케네디와 조지 맥거번을 중심으로 하는 당내 반전좌파 세력, 휴버트 험프리를 중심으로 하는 당권파 세력, 그 외의 보수주의 성향 민주당원 등이 갈등했고, 헨리 잭슨의 매파 민주당원, 제리 브라운의 포퓰리즘 세력, 여전히 당 내에 세력이 있었던 인종주의 남부민주당원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1976년 대선에서 지미 카터가 대선 후보로 결정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당의 양대 파벌을 이끄는 케네디 가문과 휴버트 험프리가 명시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사분오열이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지미 카터는 이러한 민주당의 계파 갈등을 이용해 때로는 진보로부터, 때로는 보수로부터 지지를 받는 전술을 구사하며 예비선거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결정적으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백악관에 도덕과 품위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 주의 주지사를 한번 지냈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참신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또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은 오히려 기독교를 믿으니까 도덕적이고 청렴할 것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계 입문 이전에 땅콩 농사를 지었고 해군에도 복무해 좋은 성과를 냈다는것도 홍보 포인트가 됐다. 이것의 공통점은 모두 지미 카터의 실제 정책보다는 이미지가 중점적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지미 카터는 언론 플레이에도 능숙한 인물이었는데, 기자들의 이름을 외우고 개인적인 전화를 걸어 땅콩 농장에 놀러오라고 격려하곤 했다. 언론사들은 지미 카터의 청렴성과 비주류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그렇게 카터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1976년 대선에서 당선된다.

 

카터의 침례교 보수주의 사상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는 인권외교라고 불리는 정책을 펼쳤다. 인권외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세계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분명하게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나온 정책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지미 카터는 이런 인식을 국외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확대했다는 점이다. 지미 카터는 보수주의자로서, 정부는 보모가 아니며,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격려를 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한다는 매우 강력한 우파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78년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은 카터의 이런 신념을 보여준다.

 

We need patience and good will, but we really need to realize that there is a limit to the role and the function of government. Government cannot solve our problems, it can’t set our goals, it cannot define our vision. Government cannot eliminate poverty or provide a bountiful economy or reduce inflation or save our cities or cure illiteracy or provide energy. And government cannot mandate goodness. Only a true partnership between government and the people can ever hope to reach these goals.

우리는 인내와 선의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정부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걸 명심해야합니다. 정부는 우리의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설정할 수도 없고, 비전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빈곤을 근절하거나 풍요로운 경제를 일구거나 물가 상승을 억제하거나 도시의 상황을 돕거나 문맹을 퇴치하거나 에너지를 보급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선함을 명령할 수도 없습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위대한 목표를 대중과 함께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 뿐입니다.

 

- 지미 카터 대통령, 1978년 1월 19일 연두교서 中

 

카터는 케네디, 존슨, 심지어는 닉슨보다도 일부 보수적인 사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닉슨은 정부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케인스주의적인 통화 정책을 사용했고, 측근 존 코널리(John Connally)를 재무장관에 앉혀 직접 재무 상황을 통제하고자 했으며, 금본위제를 종식시키고 1970년 단기공황을 극복하는 등 정부의 주도적인 경제 사회 문제 대응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카터는 정반대로 닉슨과 존슨의 그러한 정부 개입적인 태도가 워터게이트 사건과 같은 정부의 비대화와 부패함을 불러왔다고 비판하며, 정부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지미 카터는 정부가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국민들이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만 해주는 것이고 그 외 나머지는 지역 커뮤니티와 국민 스스로가 알아서 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We are at a turning point of our history. There are two paths to choose. One is a path I’ve warned about tonight, the path that leads to fragmentation and self-interest. Down that road lies a mistaken idea of freedom, the right to grasp for ourselves some advantage over others. … All the traditions of our past, all the lessons of our heritage, all the promises of our future point to another path, the path of common purpose and the restoration of American values. That path leads to the true freedom for our nation and ourselves.

우리는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늘 밤 제가 경고한 길, 즉 분열과 사리사욕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자유에 대한 잘못된 생각,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만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미국이 성취한 모든 전통, 우리가 역사를 통해 얻는 모든 교훈, 미래에 대한 약속은 이와는 다른 또 다른 길, 즉 공동선과 미국적 가치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그 진정한 길은 조국과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유로 이어집니다.

- 지미 카터 대통령, 1979년 7월 15일 <불쾌한 연설 Malaise Speech> 中

 

1979년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미국이 불황으로 접어들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러한 신념을 다시 국민에게 설명했다. <불쾌한 연설>이라 불리는 이 연설의 요지는 간단했다. 미국이 경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물신적인 탐욕에 휘둘려 신의 부름을 잊고 만 미국인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이 연설 직후 카터의 지지율은 60%대까지 상승했지만, 정작 카터는 이 연설을 하고 난 뒤 자신이 오일쇼크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라고 전혀 말하지 않아 지지율을 알아서 까먹었다.

 

카터는 대신 자신이 모범을 보이면 미국인들도 그것에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웨터 입으면서 난방비 아끼기, 카풀하기, 물건 아껴쓰기 같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사회 캠페인 같은 것을 정책적으로 주로 내놓았고, 미국의 폭등하는 물가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한 의지는 적었다. 즉, "경제 위기는 국민이 알아서 타계할 문제지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를 지미 카터는 매우 굳게 믿고 있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카터는 통화 조절을 통한 시장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경제 위기를 타계할 것이라고 믿고 오일쇼크 동안 거의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목회자나 철학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카터는 실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대통령이었다. 

 

시민의 자급 자족, 기독교적인 규율, 자기 희생, 물질적 부가 아닌 정신적 만족감과 같은 것은 좌파의 의제인가 우파의 의제인가? 지미 카터의 연설은 존슨이나 루스벨트의 연설과 크게 달랐다. 루스벨트는 노변담화를 통해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촉구하였다. 반면 작가 아인 랜드(Ayn Rand), 정치가 론 폴(Ron Paul),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정부의 시장 - 정치 개입이 절대적인 악이며 근본적인 신앙심과 도덕심으로의 회복을 통한 시민의 자율적인 삶이 실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카터가 루스벨트와 같은 진보적 개입주의가 아닌, 앞서 거론한 우익 자유주의자들의 논리에 가까운 연설을 많이, 그리고 종종 했다는 점이다. 카터의 많은 연설에서 그의 뒤에 있는 기독교 보수주의의 색체를 볼 수 있다.

 

위대한 규제 해제자 카터

Why Carter was committed to undoing business regulation? Because he was embarrassed by it—and he felt, correctly, that deregulation would temper inflation. (...) He sure did deregulate. The story of the incredible disinflationary economic boom of the 1980s and 1990s is incomplete without Carter’s deregulation.

왜 카터 대통령은 그렇게나 많은 규제 조치를 폐지하였는가? 왜냐하면 카터가 믿기로는, 규제 항목 자체가 말이 안되게 복잡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진정으로 규제를 해제한 대통령이었다. 레이건과 부시가 이룩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놀라운 경제적 업적은 카터의 규제 해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 보수 성향 경제지 포브스(Forbes)의 칼럼, 2023년 5월 3일

 

정부가 정책에 있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보수주의자 카터는 이를 말로만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제 정책에서 끊임 없이 추구하였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표현이지만, 미국 보수파는 카터를 "위대한 규제 해제자"(Great De-regulator)라고 부른다. 실제로 지미 카터는 FDR-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을 거쳐 만들어진 여러 관료적 규제를 혁파하였다. 일부는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대게는 너무 지나쳐서 노동조합과 민주당 기존 지지층에게 엄청난 반발을 몰고 온 것들이었다.

 

1. 항공 규제 완화 - 긍정적인 예시로는 "항공 규제 완화법"이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8년 항공규제완화법(Airline Deregulation Act of 1978)에 서명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미국 항공사에게 가해졌던 규제를 해제함에 따라, 소수 대형 항공사가 독점하고 있던 항공운송 분야에 여러 업체가 뛰어들었다. 규제완화를 통해 이제 단거리 노선도 항공사가 마음대로 개설할 수 있었고, 지역 거점 항공사와 지역 공항이 우후죽순 만들어졌다. 이 규제 완화를 통해 항공 여행이 쉬워진 것이 사실이고 테드 케네디(Ted Kennedy)와 같은 민주당 진보파 역시 항공규제완화법에는 동조하였다.

 

2. 에너지 규제 완화 -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민간 사업과 합작 투자를 통해 200억 달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 미국 합성연료기구(US Synthetic Fuels Corporation)를 창설했다. 또한 1978년 11월 9일 석유와 천연가스를 체굴하는데 필요한 사기업의 규제 사항을 대거 철폐했다. 이 규제 완화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폭등했고 텍사스 주 등에서 석유 회사 붐이 일어났다(이때 조지 W. 부시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석유 회사를 운영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랄프 네이더와 같은 시민운동가들은 이 법이 실질적으로 석유 소비 증가를 이끈다며 거부 운동을 벌였다.

 

3. 트럭 규제 완화 - 카터 대통령은 1980년 자동차운송법(Motor Carrier Act of 1980)을 통해 이전까지 트럭 회사들에게 부과되어있던 운송 제한과 요금 책정을 폐지했다. 이 법의 결과로 미국 트럭 회사를 얽매던 규제가 사라짐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트럭 회사들이 신설되었고, 특히 저비용 무노조 트럭 회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트럭 노동자의 인권이 크게 하락했다. 1980년 대선에서 전국 트럭노조 팀스터스는 로널드 레이건이 지미 카터에 비해 트럭 정책에 있어 더 친노동적이라는 이유로 레이건 지지를 선언했다.

 

4. 철도 규제 완화 - 1980년 10월 카터 대통령은 스태거스 철도법(Staggers Rail Act of 1980)에 서명했다. 이 법을 통해 그동안 철도 회사에 부여되어있던 요율이 전면 폐지되었으며, 철도 운임을 회사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게 했고, 철도 요금을 크게 인하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법으로 미국 화물철도 업계는 큰 수익을 얻었다.

 

이 외에도 지미 카터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통해 확립된 여러 규제법들이 관료주의에 묶여있다는 이유로 폐지하였다. 카터 대통령의 규제 완화 정책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레이건이 추진한 규제 완화만큼이나 카터 대통령 역시 많은 규제를 완화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보수 언론에게는 칭찬을 받았지만 진보 언론과 정치가, 노조에게는 큰 반발을 샀다. 특히 이 시기 여러 노조가 규제 완화에 있어, 레이건을 카터에 비해 더욱 진보적인 성향이 있다고 여겨 지지하기도 하였다.

 

재정균형의 수호자, 혹은 낙수효과의 신봉자

지미 카터의 또다른 경제 정책 기조는 완전한 균형 재정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예산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서민들에게 값싸게 주택을 제공하고, 고용 될 수 있도록 돕는 미국형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닉슨 대통령은 존슨의 여러 복지 정책을 다듬었고 자신만의 의료보험 개편안도 2번이나 추진했다. 포드도 닉슨의 바통을 이어받아 존슨의 "위대한 사회" 복지 정책을 수정, 보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이러한 경향이 미국에 심각한 예산 적자를 불러오고 이는 곧 미국 경제를 파산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 하에 지미 카터는 대통령으로서 복지 정책을 대폭 확충하는 대신, 자신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규 복지 정책 추진도 중단하고, 기존 복지를 축소하거나 개혁하여 균형재정을 달성하고자 했다.

 

1977년 카터 집권 직후 조지프 A. 칼리파노(Joseph A. Califano jr.) 보건장관은 미국 빈곤층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서민층을 위한 복지를 확충해야한다고 제안했지만, 카터 대통령은 이것이 전임자들의 복지 정책으로 늘어난 적자에 더 큰 적자를 더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테드 케네디와 제이컵 K. 재비츠(Jacob K. Javits)를 위시로 한 민주당 - 공화당 양당의 진보파 의원들은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를 제안하였다. 카터 대통령은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며 국가 부채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것이라며 이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카터 대통령은 국민연금이 파산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국민연금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한 법(Social Security Financing Amendments of 1977; 사회보장 수정안)에 서명했다. 모두 복지의 확대보다는 균형 재정을 달성하기 위한 법안이었고, 민주당은 이것이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에 가까운 법안이라고 주장하며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면서도 카터는 재정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경기 부양의 힘을 믿었고, 제한된 세금 개혁이 이것의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카터 대통령은 1977년 취임과 동시에 50억 달러의 세금 환급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미국의 납세자들은 정부로부터 50달러에 달하는 일회성 세금 환급을 지급받았는데, 카터는 세금을 환급함으로써 경기가 다시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카터는 9억 달러의 법인세를 감면하는 보수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펼쳤다. 이 역시 카터의 규제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는데, 카터는 법인세를 감면하면 기업이 더 많이 투자해서 더 많은 직원이 고용되며 이것이 경제 성장과 서민의 소득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Almost $17 billion in income tax cuts will go to individuals. Ninety-six percent of all American taxpayers will see their taxes go down. For a typical family of four, this means an annual saving of more than $250 a year, or a tax reduction of about 20 percent. A further $2 billion cut in excise taxes will give more relief and also contribute directly to lowering the rate of inflation.

미국인들은 거의 170억 달러에 달하는 소득세 감면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 납세자 96%의 세금이 인하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4인 가족의 경우, 이는 연간 250달러 이상의 세금이 인하되거나, 약 20% 정도 세금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비세를 추가적으로 20억 달러 인하함에 따라, 세금 인하의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고, 이는 경기를 부양하여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입니다.

- 1978년 1월 19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연두교서 (레이건의 연두교서가 아님)

이 외에도 카터는 대통령 직속 비용통제위원회(President's Private Sector Survey on Cost Control)를 설치해 워싱턴 D.C.의 중앙 정부 부처가 돈을 낭비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감시하고자 하였고, 1978년 세금개혁법(Revenue Act of 1978)을 통해 최고 세율은 2% 감소시켰으며, 세금 감면 및 단순화법(Tax Reduction and Simplification Act of 1977)으로 중소 석유 생산업체에 대한 세금을 삭감하였다. 정작 카터는 이런 세금 감면과 복지 확대 중단 및 축소를 추진시켰으면서 국방비를 감축시키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는 1976년 대선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50억 달러나 국방비를 줄이겠다고 했지만 1977년 취임 후 하원 예산위원회가 내놓은 국방비 점진적 삭감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즉 카터는 세금을 줄이면 경제가 부양되지만, 복지를 확충하면 예산 적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방비를 축소하지 않았고 이러한 정책을 레이건이 그대로 계승하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레이거노믹스의 유산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실 이미 카터가 상당 부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카터는 낙수효과의 신봉자중 하나였다. 

 

진보 민주당원들의 반발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원들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던 카터의 이런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심지어 일부 공화당원들조차 카터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이 때문에 지미 카터의 리더십은 크게 흔들렸고, 의회의 자유주의자들과 카터는 끊임 없이 충돌하였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당은 하원 435석 중 292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국회로 따지자면, 민주당이 300석 중 202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엄청난 의석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의 위신이 엄청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의회를 가지고도 카터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을 드러냈으며 오히려 의회와 싸웠다. 이 기간동안 의회는 총 5번, 총 56일동안 셧다운되었는데, 메디케어 개혁이나 공무원 세제 개혁, 방위비 같은 문제 때문이었다. 비교하자면 레이건 대통령 당시 셧다운 기간이 총 14일이었는데 이는 레이건이 오히려 카터보다 민주당 의회와 사이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198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서 카터 대통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나왔다. 적극적으로 반기를 든 인물은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동생,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한 조사에서는 테드 케네디가 출마하면 민주당 내에서 60%가 넘는 지지를 받아 20%대 후반에 그친 카터 대통령을 엄청난 차이로 제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테드 케네디를 지지한 사람이나 조직들도 범상치 않았다. 전미 최대의 노조인 AFL-CIO를 비롯해 미국의 거의 모든 진보 성향 노조가 카터 지지를 거부하고 케네디를 지지하였으며,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1968년 부통령 후보 에드먼드 머스키, 배우 마틴 쉰, 배우 겸 사회운동가 제인 폰다, 위스콘신 주지사 패트릭 루시 등 거의 모든 진보 성향 민주당 중진 정치가와 사회운동가, 셀럽들이 테드 케네디를 지지하였다.

 

비록 테드 케네디는 1969년 자신의 여비서가 물에 빠졌는데도 이를 구조하지 않아 죽도록 방조했다는 "차파퀴딕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이란 혁명으로 외교 상황이 불안정해지고 카터의 외교적 리더십에 귀추가 쏠리고, 결정적으로 케네디가 언론 대응 능력에 미숙함을 보이면서 40% 정도만을 득표하며 경선에서 당선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이렇게나 많은 중진 정치가와 셀럽들이 같은 당의 예비선거 후보자를 지지한 적이 없다. 이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닉슨 사면으로 지지율이 땅에 떨어진 1976년의 제럴드 포드와, 베트남 전쟁으로 인기가 추락한 1968년의 린든 존슨 정도이다. 지미 카터가 당 내에서 보인 지분은 포드나 존슨보다도 적었고 만약 케네디가 언론 대응 능력에 있어 강점을 보였다면 카터는 재선 도전은 커녕 선거에 나서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망의 본선에서도 카터는 진보층의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당시 대선의 구도는 중도파의 카터, 극보수파의 레이건, 그리고 공화당을 탈당해 출마한 제3지대 무소속 후보 존 앤더슨의 대결이었다. 존 앤더슨은 카터와 레이건 모두를 비판하고 중도적인 정책을 제안한 전형적인 제3지대 양비론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좌파 성향 유권자들이 존 앤더슨에게 호감을 느꼈다. 민주당 내에서 일찍이 케네디 지지를 선언한 패트릭 루시 위스콘신 주지사는 아예 민주당을 탈당하고 앤더슨 캠프에 참여해 앤더슨의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대학가에서는 앤더슨의 지지가 카터의 지지를 훨씬 추월했으며, 선거 당일의 출구조사에서는 좌파 성향 유권자의 12%나 되는 사람이 공화당 탈당파 앤더슨을 찍었다고 밝혔다. 케네디 가문의 근거지 매사추세츠에서 앤더슨이 받은 표는 17%에 달했다.

 

1960년대, 미국 진보 정치가 전성기였을 시절의 투표율은 60%대 초반에 달했지만 카터가 재선에 도전한 1980년 대선에서 투표율은 53%에 불과해 1976년 대선과 함께 2차대전 이후 최저 투표율의 기록을 경신하였다. 미국 진보정치의 심장인 매사추세츠 주의 경우, 1976년 대선 투표율은 69.8%에 달했지만, 1980년에는 겨우 59%에 그쳤다. 카터에 실망한 진보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으면서 카터는 패배했다.

 

총평

리처드 닉슨에서 로널드 레이건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신보수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로, 역사학자 릭 펄스틴(Rick Perlstein)은 이 시기를 미국 강경보수의 보이지 않는 다리(Invisible Bridge)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약간의 텀이 있었는데, 그것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민주당이 상하원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던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의 시기였다. 이 시기, 험프리-호킨스 완전고용법(Humphrey–Hawkins Full Employment Act), 평등권 수정안(Equal Right Amendment; ERA), 제2차 핵확산 방지조약(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II; SALT II)와 같은 진보적인 입법이 추구되었고, 처음으로 미국 정보기관의 진실을 파해치고자 한 상원 처치위원회(Chuch Commettee)가 출범하는 등의 개혁안이 추진되었다. 즉, 이 시기는 레이건으로 넘어가는 미국 극우화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으며 그만큼 민주당 대통령의 리더십이 역사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그러한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미국의 우경화를 막기는 커녕 가속화시켰다. 물론 카터가 못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카터는 연방에너지부와 교육부를 설치해,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했고, 석탄 산업을 규제하였고,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전지판을 설치하며 재생에너지에 처음으로 투자한 대통령이 되었다. 마리화나 소지 합법화 추진, 마약 재활 기금(Compassionate IND) 마련과 같은 시대를 앞서간 마약 대응 정책도 칭찬할만 하다. 닉슨이 구축한 종합고용 및 훈련법(CETA)을 확대하고 푸드스탬프를 250만명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취임하자마자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자를 모두 사면한 것은 말할것도 없는 위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 사회의 우경화를 저지하기에는 너무 국소적이고 제한적인 개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카터는 규제를 해제하고, 세금을 인하하고, 복지 정책 추진을 거부하고, 민주당 지지 기반을 스스로 축소시켰다. 그는 모든 문제에 있어 기독교 근본주의에 가까운 "노력과 인내"를 강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종 정책이나 환경 정책 등 일부 정책에서 진보 성향을 드러내면서 레이건을 비롯한 신보수주의자들은 그를 대책없는 진보의 아이콘이라고 몰아붙였다. 비록 그 당시에는 이런 공격이 카터에게 치명상을 입혔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다. 레이건에 밀려 낙선한 비운의 진보주의자, 이상주의자, 도덕적인 진보파로 미화되었다.

 

종합해서 보자면, 지미 카터는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만한 힘과 권력, 그리고 그를 뒷받침해줄 훌륭한 국회의원들을 뒤에 많이 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지미 카터는 모두 저버렸다.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전직 대통령이었다. 99세 생일을 축하한다.

 

번외: 월터 먼데일, 비운의 부통령

지미 카터의 유산 속에서 한명을 기리고자 한다. 월터 "프리츠" 먼데일(Walter Fritz Mondale) 부통령이다.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먼데일을 1984년 대선에서 레이건에게 압도적으로 패한 인물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먼데일은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가로 기억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으며, 지칠줄 모르고 노동자와 소수인종의 권익을 위해 싸운 미네소타의 진보 영웅이었다. 지미 카터는 단지 험프리를 비롯한 민주당 내 주류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월터 먼데일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먼데일은 카터보다 더욱 많은 것을 이루어냈고, 카터 정권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해냈다. 지미 카터가 진보 자유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을 때 가장 앞장서서 카터를 변호한 것이 먼데일이었고, 백악관에서 고집에 빠져있던 카터를 설득한 것도 먼데일이었다. 먼데일은 카터가 백악관 속에 표류되지 않도록, 그리고 화를 내는 민주당 진보파가 카터와 척을 지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한 진정한 부통령이었다. 그는 상원에서의 오랜 경력을 토대로 외교, 안보, 경제 문제에 있어 카터와 대비되는 진보적인 보완책을 내놓았고 이것이 대체로 카터의 업적으로 기억된다. 딕 체니(Dick Cheney) 이전에 실세 부통령의 대명사는 월터 먼데일이었다.

 

그러한 훌륭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정치가가 겨우 부통령의 지위에 머무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1976년 대선에서 먼데일이 카터 대신 당선되었다면, 미국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우 불운한 정치가였고 그만큼 현대에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민주당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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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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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년 전

    대통령보단 목사가 어울렸던 사람 - 먼나라 이웃나라

  • 공산1968 글쓴이
    1년 전
    김긴배

    이원복 걔는 나보다도 미알못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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