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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1일 (금) 00:3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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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장 게오르크 루카치 Georg Lukac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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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죄르지 루카치 (György Lukács) |
이명 | 세게딘 남작 루카치, 게오르크 베나르트 (Georg Bernard Baron Lukács von Szegedin) |
출생 | 1885년 4월 1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부다페스트 | |
사망 | 1971년 6월 4일 (향년 86세) |
헝가리 SRR 부다페스트 |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트란스라이타니아) → 라트 연방 ( 헝가리 SRR) |
재임기간 | 제3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장 (장관급) |
1945년 12월 17일 ~ 1946년 10월 1일 | |
제4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장 (장관급) | |
1949년 9월 1일 ~ 1952년 12월 31일 | |
부모 | 아버지 뢰빙게르 요제프 |
학력 | 콜로스바르 헝가리 왕립 대학교 (철학 / 박사) 베를린 대학교 (철학 / 박사) 헝가리 왕립 대학교 부다페스트 (철학 / 박사) |
종교 | 유대교 → 루터교 → 무종교 (무신론) |
소속 정당 |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
사상 | 신칸트주의 →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 |
개요
라트 연방의 철학자, 미학자, 정치인. 20세기 초반 라트 연방 마르크스주의 학계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헝가리 인물로, 흔히 알려져있는 "게오르크 루카치"는 독일계 이름이다. 헝가리계 이름은 "루카치 죄르지"이다.
생애
188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계 은행가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인 뢰빙게르 요제프 세게딘 1대 남작이었으며, 뢰빙게르 요제프가 1890년 헝가리계 사회 편입을 목적으로 유대계 성을 버리고 헝가리식 성인 루카치를 채택하며 뢰빙게르 죄르지는 루카치 죄르지가 되었다. 1907년, 유대교에서 루터교로 개종했다.
1904년, 프란츠 요제프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몇년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베를린 대학교(오늘날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베를린 캠퍼스)에서 수학했다. 그곳에서 게오르크 짐멜, 막스 베버 등 보수 성향의 사회학도들과 긴밀히 교류했다. 루카치는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와 출신 성분, 동료들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보수주의자였고 철학적으로 신칸트주의 학파에 속하게 되었다. 독일 유학 중, 그는 아버지로부터 남작 작위를 물려받아 제2대 세게딘 남작이 되었다. 1915년, 그는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소설의 이론>을 작성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점차 보수주의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1919년 독일 혁명을 계기로 우파에서 좌파로 전향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1919년 헝가리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쿤 벨러를 도와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건국했고 공화국의 첫번째 문화상으로 취임했다. 이때 불과 34세에 불과했다. 그는 흑적내전에서 주요 지휘관, 즉 정치장교로 복무했다. 1922년 라트 연방이 개국된 후 그는 헝가리 SRR의 초대 문화상이 되었다. 그는 라트 연방 건국 후 스스로 귀족 작위를 포기했는데 때문에 그는 별명이 "붉은 남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쿤 벨러의 강압적인 스타일과 비도덕적 통치에 반발하며 그와 멀어졌고 1927년 문화상을 자진 사임했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코민테른에서 근무하며 유럽 전역을 떠돌다가, 1931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요청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연구원직을 수락했다. 이때 그는 여러 저작을 남겼으며, 마르크스주의 미학 이론을 발달시켰다. 1930년대 대테러 당시 슈트라서와 사이가 나빴으나 쿤 벨러와 사이가 더 나빴던 탓에 쿤이 숙청당하는 와중에 본인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1945년까지 ML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연구소장을 지냈다. 1946년 유대인 강제이주 당시 항의하는 의미에서[1] 연구소장 직위를 내려놓았으나, 1949년 슈트라서의 사망 이후 복직해 1952년까지 재직했다.
1953년, 헝가리로 재입국하여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부다페스트 캠퍼스에서 철학과 강사이자 학과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얼마 후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루카치는 여러 후학을 양성하는데, 이들은 부다페스트 학파라는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이루게 된다. 1956년, 그는 개혁적인 너지 임레의 헝가리 SRR 내각에서 다시 문화상을 맡았다. 그러나 너지가 너무 우파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몇달 가지 않아 문화상을 사임했다. 1960년, 루카치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명예소장으로 임명되어 죽을때까지 재직했다.
1968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문화대혁명과 헤르베르트 프람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이것으로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에서 거의 제명될뻔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제명하지 못했다. 도리어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중앙 연방정부의 문화상을 지내줄 것을 요청받기도 했으나 늙은 나이 탓에 스스로 거부했다. 말년에 바더 마인호프를 비롯한 좌파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여진 그는 1971년 6월, 회고록 저술 도중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상
루카치는 총체성(totalität)을 세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본다. 총체성은 사회적, 역사적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세계사적인 총체성 속에서 개개 사물과 사건은 그 맥락에 의거하여 의미를 얻는다. 횔덜린과 마찬가지로 루카치에게 있어 총체성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과 같은 것이다. 소설의 이론(1916)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인간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인간과 세계는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처럼 연결되었다. 즉, 인간은 사회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 하에서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 산업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인간은 더 이상 공동체와 자연, 사회적 관계 속에서 통합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사회에서 총체성이 무너졌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이러한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물화(物化; verdinglichung)의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고, 나아가 생산물이 재화, 화폐, 상품의 기능을 하게 되면서 생산자와 분리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만 인식하게 해 과거의 숭고한 가치들을 금전적 가치로 전화시킨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루카치는 인격화(personifizierung)를 제안한다. 인격화는 물화와 반대되는 의미이다.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이러한 반자본주의적인 극복을 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뿐이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계급과 달리, PT 계급은 역사적인 총체성에 있어 물화를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자신의 역사적 맥락에서의 역할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향후 발달할 역사의 유일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미학으로 들어가자면, 그는 예술의 역할을 역사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역사적인 총체성의 맥락에 있어 개별자라고 볼 수 있는 예술 역시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 부르주아적인 미학(이른바 "소부르주아지적인 아틀리에")은 역사의 일부 단편적인 사실만을 조잡하게 취하여 현실 세계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반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역사를 전체적인 것으로 해석해, 그 속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관람자는 자신이 총체성의 맥락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깨닫고 계급의식을 갖추게 된다. 그 점에서 루카치는 리얼리즘적 예술은 그 자체로 혁명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평가
그는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있어 사적 유물론을 연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반면, 역사적 유물론에는 큰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서구 마르크스주의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주류 정치경제학의 이론에 대해 크게 반기를 들지 않았으며 궁극적으로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에 속하였다. 대부분의 학자에 의해 초좌파적인 경향으로 지적되었던 루이 알튀세르 등과 달리 그는 유럽의 여러 명망있는 학술지에 의해 논문이 개재되었다.
2019년 ARR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라트 연방의 인물" 3위로 꼽히고, 카를 마르크스 대학교/부다페스트 캠퍼스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매년 열리는 것은 이러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영향력이 강한 학자로 꼽힌다. 그는 가라타니 고진,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국문학 이론 연구에 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